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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하얀 수정의 바람.

by @Zena__aneZ 2024. 4. 22.

은빛의 수호자는 성역의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성역의 깊은 곳에는 그의 친우가 잠들어있었다. 은빛의 수호자와 함께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네 번을 깨어나며 세상을 지킨 영웅. 하지만 세 번째, 역병에 걸려 그 몸이 완전한 수정이 되어버린 존재. 전신이 조각나는 듯한 고통 속에서 제 일족을 구원하고 역병을 시작하게 한 두 존재 중 하나는 수호자가, 다른 하나는 그의 친우가 베어냈다. 다만 그의 친우는 이성이 사라져 수정으로 된 괴물이 되기 직전, 은빛의 수호자에게 부탁했다. 자신을 영원한 수정으로 만들어달라고. 그 바람대로, 은빛의 수호자는 제 친우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는 영원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상이 되었다.

다만 그 수정이 되어버린 것은 일족이 위험할 때면 심장에 박힌 검을 빼들고 일어났다. 차디찬 수정의 몸으로 신과 맞먹는 자들과 싸웠다. 머리 위에 쓴 가시관에서 기다란 뿔이 자라나 얼굴을 가리고, 이윽고 가면처럼 만들어졌다. 그것에는 의지라고 할 것이 없었다. 뇌도, 심장도 모두 수정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하지만 살아생전의 그 바람이 지나치게 강렬하여 축복을 내린 것인지, 그는 죽고 나서도 자신의 일족을 은빛의 수호자와 함께 지킬 수 있었다. 

 

"오랜만이지, 미르."

 

나야, 미리내. 보고 싶었어. 그는 무릎꿇은 채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는 수정 앞에 앉았다. 마치 먼 옛날, 함께 밤하늘을 보며 앉아있던 것처럼. 이제 그는 혼자였다. 입안에 씁쓸함이 감돈다. 신과 싸우고 나서 다시 수정상이 되어버린 친우의 모습이 눈에 새겨진다. 길게 물결치는 노란빛의 머리칼과 강렬한 주홍빛 눈은 하얀 수정빛으로 변해버렸다. 그 색을 아는 자는 이제 수호자라고 불리는 그밖에 없었다. 사실, 너를 원망했노라고 읊어내듯 말했다. 필멸자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사람이었다. 친우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티 없이 맑은 새하얀 눈이 감정을 담아내 다채롭게 빛난다. 원망하려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저 친우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이제는 그들이 구원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 세상의 안녕을 가져온 두 존재 중 하나만 남았다. 운명이라는 것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강렬한 파도였다. 그러니 우리는 그 흐름에 따라 슬픔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평화의 시대가 왔건만 왜 이것을 너는 바라보기 못하는가. 이 성역 속에 잠들길 택했던 네가, 수정이 되어가면서도 품었던 그 미소가... 후회 한 점 없이, 너무나도 강렬했어서. 실은 그게 원망스러웠다. 그 상황에서도 죄책감 하나 안겨주지 않으리라는 그 강인함이. 정말 영웅이라고 불릴 자는 내가 아니라 너였어야 했는데.

 

"그때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을까?"

 

해답을 알면서도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으니까. 최선의 선택 속에서 슬퍼하는 것이 미련한 인간과 다를 것이 없더라. 하지만 시작이 인간이었으니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도 슬픈 미소를 머금었다. 품에 가지고 있던 작은 피리를 꺼낸다. 평화의 시대가 오면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같이 부를 수는 없지만, 이 자리에 함께 있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그는 가볍게 숨을 불어넣는다. 이제는 모두가 잊어버린 민요가 흐른다. 모닥불 앞에 모여앉아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르던 그때를 생각한다. 영원을 산다는 것은 영원히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 친우의 상실은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슬픔이고 가장 큰 공허함이었지만, 공허를 굳이 채우지 않아도 괜찮았다. 시간이 될 때면 이렇게 찾아와 오래도록 악기를 연주하면 됐다. 영원을 산다는 것은, 영원히 흘러간다는 것이었으니. 너는 그저 수정이어라, 나는 그저 수정의 바람을 들어주는 존재가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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