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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비탄할 자유를.

by @Zena__aneZ 2024. 4. 29.

그는 검을 들었다. 검에서는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고, 이윽고 눈앞의 어떠한 악을 베어낸다. 그것이 진짜 악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원했기에 든 검이었으니. 다수의 의지에 개인의 생각이란 너무나도 쉽게 말소되곤 한다. 한때는 그것이 슬펐을지도 몰랐으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는 타인의 의지대로, 흐름대로 움직일 뿐이다. 개인의 판단이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감정이라는 것이 깃들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타인의 의지로 움직여라. 영웅은 그저 그런 존재이니. 그는 숨을 길게 내뱉는다. 들이키고 내뱉는 숨에서 매캐한 혈흔의 향기가 맴돌았다. 물기 없이 뻣뻣해진 눈을 억지로 감았다 뜬다. 폐부에 사포질하는 듯한 뭉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내려다본 손은 유독 창백했고, 제 몸상태와 달리 멀끔한 검에 비친 옅은 푸름은 눈부실 정도로 빛나서. 개인의 감정이 말소된 영웅의 삶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가. 그는 고개를 돌린다. 제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죽은 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도망쳤겠지. 제 주변에는 언제나 실력있는 치유사들이 가득 있었으니. 그가 도와준 사람들은 무사했지만 그만이 무사하지 않은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말소가 당연시되는 이 세상 속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고 마는 것은 영웅이었다. 모두가 그만큼은 괜찮다고 믿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것이 슬프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딱 하나였다.

 

"... 이제와서."

 

이제와서 그것이 슬플 리 없다. 영웅에게 나약함이란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제 피가 흩뿌려진 대지 위에 검을 박아넣고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기도하듯이. 회개하듯이. 모두가 바래 마지않는 행위를 이어갔음에도, 그는 언젠가의 누군가에게 반드시 사죄해야 할것만 같다 느꼈다. 과거에 죽어버린 자신에게 향한 기도일지도 몰랐다.

바닥에 꽂힌 검은 십자가처럼 빛난다. 퍼석하게 마른 눈을 감는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나를 울게 하소서. 말소됨이 상처가 되게 하시고, 상처가 슬픔이 되게 하시며, 이윽고 슬픔을 잃어버린 당신의 종이 온전히 비탄할 수 있게 하소서. 이윽고 절망하게 하소서. 나를 울게 하소서...

언젠가부터 읊조린 말이었다. 신에 대한 대단한 신앙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가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상대는 언제나 절대적인 존재였다. 혹은 자신의 무능력으로 죽은 이들을 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나약함이었나. 그런 사소한 것은 구분하는 의미가 없었다고.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내는 것조차 다른 누군가의 의지였다. 애초에 제 것이 아닌 삶이었다. 감정 한 줌조차 지우는 것이 퍽 쉽더라. 간절한 기도를 바치는 모습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건함을 넘어서 불안감으로 변모할 때쯤, 강렬한 보랏빛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그는 그 힘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

 

"루우! 세상에, 몸 상태가 이게 뭐에요?"

 

"별 것 아닌 적이..."

 

"씨알도 안 먹히는 거짓말하지 마요. 지금까지 정신을 잃지 않은 게 용할 정도라고요."

 

그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주억였다. 치유사는 급히 술식을 외우며 그의 손등에 치유각인을 새긴다. 치열한 전투로 인해 통각이 모조리 마비되었던 것이 그제야 나아지는 것인지, 아무것도 없던 표정이 사람답게 찡그려진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부상을 하나하나 다 읊기에 민망할 정도라고요. 그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치유사는 그런 그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다 앉으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도망쳐도 괜찮아요."

 

"내가 도망치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죽을텐데?"

 

"그래도요."

 

당신도 사람이니까요. 그는 여전히 버석하게 마른 눈을 깜빡인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서는 여전히 지독한 피냄새가 느껴진다. 그는 여전히 비탄할 자유를 원했다. 도망치지 않는다면 영원히 얻지 못할 자유를 말이다. 능력 좋은 치유사는 그를 가만히 눈 안에 담다가, 가방 한편에 잘 개어놓은 담요를 꺼내 둘러준다. 전혀 춥지 않았지만, 담요를 두른 순간에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인식했다. 추위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 아마 당신의 감정에서도 그러겠지.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말해도 모를테니 곁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칸나, 저쪽에서 치유사를 찾는 것 같은데."

 

"부상자가... 여기에서 가만히 쉬고 있어요! 치유사 말 안 들으면 진짜 큰일난다구요!"

 

또 고개를 주억인다. 치유사는 뛰어가듯 걸음을 옮긴다. 그는 치유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든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청색 시대의 슬픔만큼, 청춘의 기쁨만큼 푸르다. 한껏 누그러진 바람이 뺨을 두드린다. 그는 자유 속에서 온전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또 바란다. 무언가에 온전히 절망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비탄할 자유를 주소서.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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