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IF. 릴리
고어틱한 표현주의 (신체결손 등)
숨이 차갑다. 설원의 향기가 매섭도록 휘몰아친다. 온몸이 뒤틀리는 감각뿐만이 정신을 명료하게 해 준다. 릴리는 자신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죽지 않았어... 고대 마수의 공격을 그대로 반사해 내기 위해 생명력을 쏟아부었으나 죽지 않은 것은 어떤 기적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온몸이 찢어지고 뒤틀리는 감각 속에서 겨우 몸을 지탱해 바로 앉고, 양손을 바닥에 댄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이 설원에서 녹음 가득한 마력이 퍼져나가 방어막이 둘러진다. 손끝이 떨려온다. 아직 죽지 않을 수 있다. 더 버틸 수 있어. 살아남은 이들의 주위에 방어막이 둘러진다. 이후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쪽 팔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강렬한 마나에 팔 한쪽이 서서히 형체를 잃으며 녹아가고, 누군가의 경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대로 의식이 끊겼다.
반짝,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뻑뻑하게 마른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북부 의료시설의 천장에, 어렴풋이 보이는 바깥은 해가 져 어두웠다. 밤인지 새벽인지도 몰랐다. 오랫동안 잠에 들어 있었나? 그리 생각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본다. 아... 그래, 그렇구나. 토벌은 무사히 끝났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히 몸을 일으켰으나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중심이 기울어 넘어졌다. 제법 큰 소리가 났고, 그런 큰 소리를 들은 건지 바깥에 있던 한 사람이 들어온다. 바닥에 넘어진 릴리의 모습을 보고 짧은 경악을 흘리고는 몸을 조심히 부축해 준다.
"바로 움직이면 안 돼. 사흘동안 정신을 잃은 상태였어."
"아... 어쩐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가더라."
그래도 살아있으니 그걸로 다행이지? 그런 말에 상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릴리는 그런 상대의 표정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시선을 굴렸다. 정말 죽을 뻔했어. 알고 있어. 릴리는 잠시 눈을 감고 말하다가 눈을 뜬다. 그렇게 상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또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난 내가 그때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어투가 너무나도 가벼워 바람이 흩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상대가 그 말을 다시 새기고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떠나지 않았어? 나는 충분히 틈을 만들어주었는데.
"... 네가 죽지 않았으니까."
지금 북부 용병단의 대표가 될 사람으로 가장 유력한 이는 릴리와 □□이었다. ■■의 입장에서는 릴리가 대표가 되는 것이 더 좋았다. □□은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조언자였으나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의 영역에 있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비슷한 일을 겪어봐야만 했다. 모두를 위한 낙원을 만들어서는 안 됐다. 낙원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새장 안에서만 살아가는 새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는 떠나려 했었다. 여기서 더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죽을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 죽지 않았고, 그 사이에서 또 빌어먹을 희망을 찾았다. 어쩌면, 이들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다시 해버리고 만 것이다. 릴리는 그가 한 생각을 쉽게도 유추해 보곤 또다시 웃어버렸다. 너답다고. 그리 말했다.
릴리는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을 의료시설 안에서 머물렀다. 다 녹아내린 왼쪽 팔과 몸이 뒤틀린 충격- 그리고 그때 몸에 스며든 고대 마수의 마나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내어야 했고 그 긴 시간 동안 후유증과 함께 살아가야 했지만 릴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살았으니까, 그리고 길게 살게 된 만큼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도 충분하니까 그걸로 다 된 거라고. 릴리는 전보다도 훨씬 더 밝아 보였다.
"□□, 북부의 대표가 된 걸 축하해."
"고마워. 앞으로 잘 부탁해, 릴리."
릴리는 간간히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심각한 후유증을 겪을 수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그가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는 릴리가 조언자로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이 나아질 터였다.
"하-... 네가 대표가 되고 나서 일이 배로 많아진 것 같아."
"그래도 나 혼자였으면 더 힘들었을지도 몰라."
그걸 생각하니까 또 아찔하네. 그렇지? ■■. 둘만이 아는 뜻을 주고받고는 또 맑은 웃음이 흐른다. 이렇게 평화로운 것이 언제였는지 아득했다. 언제나 날 서린 분위기였는데... 심장께에서 흐리게 올라오는 통증이 찬 바람에 누그러진다.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내린다. 이러고 있으니 또 과거의 추억이 생각난다. 그저 평범한 용병이었을 때는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떠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 남았고,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 살았다. 그저 그런 평범한 이야기가 설원 위에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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