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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告白.

by @Zena__aneZ 2024. 10. 8.

하늘이 어두웠다. 이곳에서 비가 내리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별일이네, 싶었다. 언젠가 이런 하늘을 보았던 것 같은데...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매캐한 것이 먼지처럼 떠다니는 것이 비에 전부 씻겨 내려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피엔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잠시 고개를 돌린다. 익숙한 기척. 소피엔은 익숙한 텍스트 창을 띄워 평이한 어조로 인사를 건네다가 잠시 멈추었다.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만이 길게 감돌았다. 그것은 이제껏 마주한 위화감의 정체와 같기도 했고, 혹은 길게 외면하고 만 마음의 한 자락 같기도 했다. 어떤 마음이 얼마나 있든 소피엔은 그런 마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실래요? 목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했으나 그는 그런 모양을 곧잘 알아보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공방의 고요한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방안은 고요하다. 어느덧 바깥에서는 빗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소피엔은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아슬아슬한 한계 위에 놓인 것만 같은 자는 침묵을 지키다가 찻잔을 들어 찻물을 삼킨다. 분명 향도, 맛도 좋았으나 날카로운 바늘을 삼키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 느껴진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인가. 또다시 멸시의 늪에 빠질 수 있지는 않은가. 옳은 일이 아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니 멸시의 늪에서 길게 헤맬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소피엔을 찾아왔다. 어떠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하는 것은, 그래, 그거다.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소피엔이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괜찮아요. 저는 언제든지 듣고 있어요. 소리 없는, 단순한 입모양에 불과한 언어가 이토록 다정하다. 그는 잠시 숨을 삼켰다가 내뱉었다.
 
"저, 사람을 죽였어요."
 
예전에요. 조금 된 일이에요. 한없이 가벼운 말투에 녹아든 것은 단순한 가벼움은 아니었다. 너무 무거워서 오히려 가벼워 보이는 아이러니를 곱씹는다면 괴로움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소피엔은 놀라지 않았다. 놀랄만한 말 안에 깃든 슬픔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자기혐오로 점철된 슬픔을 부드러움이라는 껍데기 안에 밀어 넣는 것만 같은 모습이, 이제 와서 놀라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형상이라. 소피엔은 조용히 손끝으로 그의 손등을 느릿하게 두드렸다. 많이 괴로워서, 그래서 죽였나요? 그는 평소와 같은, 하지만 훨씬 더 깊은 어투로 말을 잇는다.
 
"그 사람과 계속 있어야 한다면, 난 평생 사람으로 살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래서 죽였어요."
 
평이한 슬픔이다. 흔한 날것의 마음이었다. 소피엔은 고요하게 소리 없는 말을 이어간다. 손을 잡으면 위로가 될까요? ... 그럼요. 그는 무언가, 끓어오르는 깊은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지난 설움과 같기도 했고, 이제 막 다가온 위로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과 같이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손을 조심히 마주 잡는다. 이것은 슬픔이다. 길게, 길게, 아주 길게도 외면해 왔던 것... 그는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그 사람과의 기억이 남아있는 한, 난 사람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거짓말을 했어요. 난 진심으로... 그 모든 것을 잊고 싶었거든요. 한 번 시작된 말은 끊임없이 이어지듯 떨어진다. 오장육부를 다 꺼내놓는 것만 같은 착각이 느껴진다. 토기가 쏠린다. 다 씻어내고 싶다. 이 건조한 땅에 오랜만에 내리는 비는 그저 불쾌할 뿐이었다. 분명 그랬으나... 소피엔은 그의 거짓말과 진심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것은 달랐지만 분명히, 이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이들에게 존재했던 마음이었다. 차라리 잊고 싶었다. 다 잊어버리면 편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잊을 수 없었다. 오로지 상처뿐인 생이었다. 그래서 소피엔은 그의 손을 놓기보다는 잡기를 택했다.
 
기억이 있다고 해서 그 존재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에요.
반대로, 기억이 없다고 해서 그 존재로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당신에게 남은 기억이 당신을 괴물로 만들지 않아요.
당신은 그저 상처가 많은 사람일 뿐이에요.
그리고 사람은 상처투성이인 채로도 살아갈 수 있어요. 
 
소피엔은 멀지 않은 과거에 한 말을 떠올린다. 소피엔에게 있어 기억이 없다는 것은 아주 낯선 개념이었다.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란 얼마나 잔인하고, 찬란하며, 지옥과도 같은가... 슬펐겠네요. 괴로웠을 거고요. 그 기억이 남아있는 한 당신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일 거예요. 하지만 말했듯이, 사람은 그런 상처를 안고도 잘 살아갈 수 있어요. 그건 아주 잔인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다정한 말이죠. 우리의 존재가, 생존이... 그걸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목소리 없는 언어가 지독하리만치 다정하다. 지금껏 해왔던 모든 고민이, 깊은 응어리가 세상을 씻어내리는 듯한 빗물에 녹아내린다. 가볍게 맞잡은 손은 따뜻했고,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운치 있게 퍼진다. 아. 그렇구나. 그저 이런 말이 필요했던 것뿐이구나. 고요함이 평화가 되는 이곳의 창밖에서는 흐릿한 풀내음의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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