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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208

생명을 얻은 자 괴물이 되니. 하얀 새를 닮은 이는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다. 이 세상의 처음부터 있던, 이 세상의 가장 오래된 것. 온통 겨울뿐인 대지 위에 선 하얀 새는 모든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에게는 인간도, 마물도 모두 평등했다. 이 하늘 아래에 있는 자 모두 고결한 존재이니. 그래서 하얀 새는 두 존재를 분리해 내었다. 마물을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했고, 인간을 마물의 눈에 띄지 않게 했다.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의 혼란을 막을 수는 있었다. "평화의 시대가 왔어요, 사라 님! 덕분이에요." 너희가 일궈낸 것이 어찌 내 덕분이겠느냐고 속삭이던 하얀 새는 환한 웃음을 보인다. 사람들은 설원 위에 불꽃을 피워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또 다른 설원에서는 마물들이 평화롭게 지냈다. 하얀 새는 .. 2024. 6. 1.
봄의 끝이다. 추운 여름이다. 봄의 끝이 하얗게 물들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이 땅에는 온기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봄날의 화사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봄꽃이나 성큼 다가온 여름의 열기 대신 온통 하얀 눈송이가 주변을 밝혔다. 눈 속에서는 소리마저 느려진다. 설원 속에 서있던 이는 입김을 흘린다. 하얀 연기가 누군가의 고민처럼 흩어진다. 연보랏빛 머리칼이 찬 바람에 휘날린다면 마냥 곱지만은 못한 손으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언니, 밖에 추워요! 얼른 들어와요!" "오늘따라 하늘이 너무 예뻐서요, 조금만 더 구경하다가 들어갈게요!" 걸음을 옮긴다. 설원의 저 어딘가로. 그곳에는 겨울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온통 겨울인 이곳에서 꽃을 보기란 쉽지 않았으나, 이 겨울나무만큼은 꽃을 피우고 곱게도 반짝인다. 겨울나무는 봄.. 2024. 5. 31.
깊은 수풀의 화살. 셰피아는 항상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있었다. 중단발의 짧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면 그냥 풀고 있는 것도 제법 예쁠 것 같았지만 늘 머리칼을 묶고 있었다. 울창한 숲의 색을 띠고 있는 머리카락, 사막을 닮은 고운 모랫빛의 피부, 그리고 저 너머를 보는 것만 같은 기이한 보랏빛의 눈. 품고 있는 분위기도 굉장히 독특해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에도 적절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평범한 옷을 입고, 눈에 띄지 않게끔 꾸미지도 않고 다녔다. 사람들과 얽히는 것 자체도 꽤 피곤해했다. "그럼, 이번에는 저 혼자..." 셰피아가 먼저 손을 들고 말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혼자 간다고 하는 것을 무모하다고 할법했으나 이 회사 내에서 셰피아의 실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대표의 허가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2024. 5. 29.
지식과 애정. 분명한 분쟁의 시대였다. 행복보다 슬픔이 많고, 안전함보다 괴로움이 더 많은 시대였다. 사람들은 삶에 괴로워했고, 죽음에 슬퍼했다. 수많은 이들이 아파했다. 신이라고 불리던 괴물은 생명을 무참히 도륙 내었고, 사람을 사랑하던 극소수의 정령과 신에 가까운 절대자들은 죽어가고 있었다.그런 세상 속에 사람들이 모였다. 현자, 여행자, 권위가, 절대자, 검사, 치유사...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모으고, 지식을 덜어내었다. 생명을 모은다. 모든 지식의 원천이 모인다. 지식과 지혜를 가리지 않고, 마법과 과학을 가리지 않고, 선의와 악의를 가리지 않은 가장 순수한 지식들이 모인다. 가장 강인한 절대자와 정령이 그 지식의 심장을 손에 모아 쥔다. 이윽고 터질듯한 생명력이 넘실거린다... 2024. 5. 27.
운명의 색 운명에는 색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운명의 색을 모른다. 운명이라는 것은 항상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운명의 신은 눈을 감고 있다.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온 약속이었다. 눈을 감아도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으니 눈을 감는 것이기도 했고, 세상의 색에 매료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눈을 감아도 이리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보이는 이들이었다. 눈을 뜬다면 분명 그 모든 색에 현혹되어, 더 이상 중립을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치우쳐진 신의 애정 아래 구원받을 것이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버려질 것이다. 그래서 운명의 신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지 않았다.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기 위해서. "니엘라, 별의 여신이어." .. 2024. 5. 27.
죽음과 고통.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하지만 마주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 누구도 끝을 상정하지 않았을 때 나는 여기 있노라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죽음이고, 또한 끝을 수도 없이 그린 자를 비웃는 것처럼 뒤편에 녹아드는 것도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오만한 구석이 있었다. 다만 죽음 이후에 돌아오는 것은 재생이라 살아남은 자들은 또 걸어간다.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나아간다.오로지 끝을 목도한 이들만이 죽음을 또렷하게 바라본다. 죽음의 물결치는 머리카락은 시들어버린 나뭇잎의 색을 띠고 있었고, 죽음의 눈은 빛바랜 갈색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으며, 하얗게 새버린 흰 눈썹은 한밤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난다. 눈그늘에는 붉은 점이 나란히 세 개씩 찍혀 있었다. 목.. 2024. 5. 20.
Vanitas.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삶은 비애이다. 이 세상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살아가는 것은 고통이고, 모든 것은 유한함 위에 그려지는 덧없는 이야기였으며,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살아내는 것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더 가까운 세상이다. 홀로 걸어가고, 홀로 끝낸다. 어떤 빛나는 순간은 덧없이 진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감정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이 부딪히며 마모되고, 닳아 없어진다. 누군가는 수긍하는 법을 배우고, 누군가는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또 누군가는 체념하는 법을 배운다. 무언가를 삼키는 삶을 살고, 무언가를 토해내는 삶을 산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삶은 비애였고 덧없음이었다. 그 자체로 헛되고 헛되었다. 헛된 삶에서 의미를 .. 2024. 5. 16.
피어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꿈을 이룰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희망 없이 살아가고, 누군가는 닿는 대로 살아간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그리메는 그런 세상에 환멸이 난 사람 중 하나였다. 바라던 것을 이루지도 못하는 세상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노력해도 꽃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메는 그런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꾸준하게.갓 스물이 되고 나서는 뒷세계에 몸을 담갔다. 그리메가 소속된 기업에서는 다크 히어로라고 불릴법한 일을 했다. 불법적인 행위로 범죄자를 막는 것이 퍽 우습기도 했지만 그리메는 그런 일을 이어가는 자신의 삶을 최악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어쩌다가 한 번은 아주 나쁜 일을.. 2024. 5. 13.
그저 돌아가는 길이라고. 삶은 그저 귀향이어라.   진실을 알았다.그것만이 유일한 무게를 가졌다.복수하고 싶다는 것은 상실 앞에서 무너진 개인의 비루함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나약함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진실을 마주하겠다는 일념 하에 각자 다른 죄악감을 품고 대천사들을 상대했으나, 결국 그들의 검이 대천사를 단죄할 일은 없었다. 결국 슬픔이나 원망이나 증오와 같은 것은 개인의 날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날것을 남에게 되돌려줄 성정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 친절함은 아니었다. 다만 대천사와 같은 잘못을 하지 않으리라는 강렬한 마음이 있었고, 그들의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오로지 진실 하나뿐이었기 때문에.진실이 뭐라고. 죄책감이나 복수심이 뭐라고. 대체 그게 뭐라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을 분노로 채우며 버텼는지. 그들은.. 2024. 5. 5.
비탄할 자유를. 그는 검을 들었다. 검에서는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고, 이윽고 눈앞의 어떠한 악을 베어낸다. 그것이 진짜 악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원했기에 든 검이었으니. 다수의 의지에 개인의 생각이란 너무나도 쉽게 말소되곤 한다. 한때는 그것이 슬펐을지도 몰랐으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는 타인의 의지대로, 흐름대로 움직일 뿐이다. 개인의 판단이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감정이라는 것이 깃들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타인의 의지로 움직여라. 영웅은 그저 그런 존재이니. 그는 숨을 길게 내뱉는다. 들이키고 내뱉는 숨에서 매캐한 혈흔의 향기가 맴돌았다. 물기 없이 뻣뻣해진 눈을 억지로 감았다 뜬다. 폐부에 사포질하는 듯한 뭉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내려다본 손은 유독 창백했.. 2024.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