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208 6피트 아래에서. 생이란 참 부질없다. 세룰리아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악마와 마족이라는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종족은 끊임없이 투쟁을 일삼았다. 본인이 악마임에도 그런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타 종족과 교류하게 되자 악마 사회 내부에 있던 문제들은 더욱 심해졌다. 차별과 멸시는 줄어들지 않았고, 서로를 향하던 증오의 칼날은 이제 외부에도 향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이어진 천족과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악마와 마족 사이에서는 날개의 색으로 등급을 나눈다. 보유하고 있는 절대적인 마력의 양으로 날개의 색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신분제가 사라진 것은 한참 전의 이야기였지만 여전히 신분제가 남아있는 것처럼 사회가 굴러간다. 너무나도 많은 존재가 상처받고 죽었다. 끝나지 않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세룰리아가.. 2024. 4. 28. 하얀 수정의 바람. 은빛의 수호자는 성역의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성역의 깊은 곳에는 그의 친우가 잠들어있었다. 은빛의 수호자와 함께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네 번을 깨어나며 세상을 지킨 영웅. 하지만 세 번째, 역병에 걸려 그 몸이 완전한 수정이 되어버린 존재. 전신이 조각나는 듯한 고통 속에서 제 일족을 구원하고 역병을 시작하게 한 두 존재 중 하나는 수호자가, 다른 하나는 그의 친우가 베어냈다. 다만 그의 친우는 이성이 사라져 수정으로 된 괴물이 되기 직전, 은빛의 수호자에게 부탁했다. 자신을 영원한 수정으로 만들어달라고. 그 바람대로, 은빛의 수호자는 제 친우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는 영원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상像이 되었다. 다만 그 수정이 되어버린 것은 일족이 위험할 때면 심장에 박힌 검을 빼들고 일어.. 2024. 4. 22. 유성우의 한가운데. 깊은 밤이었다. 하늘에 수많은 새가 날아다닌다. 깊은 설원 속에 숨어사는 식인 마수였다. 한마리만 있을 때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그 마수는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었다. 겨울꽃 흐드러지는 설원에서 사는 새가 왜 이런 평원에 떼지어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사실은 여기서 처리하지 못하면 수많은 사상자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스타, 괜찮겠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자리에 있는 둘은 수많은 전투원보다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스타는 할 수 있다는 듯 옅은 미소만 지었고, 플레린은 그것을 보고 같이 옅은 미소를 짓곤 보호막을 만든다. 둘의 손등에 푸른 마법진이 새겨진다. 스타에게 걸려있는 방어막이 깨진다면 곧바로 플레린이 알아채 다시 보호막을 만들어줄 수 있도록. 그렇게.. 2024. 4. 21. 예술가의 새벽. 얼굴 위에 팔을 올린 채로 축 늘어져있다. 새하얀 손톱이 노란빛 감도는 백색 조명에 의해 빛난다. 창문 밖 휘영청 뜬 큼지막한 보름달은 작업실 내부의 창백함만큼 하얗게 물들어있었다. 사선으로 흩어지는 수많은 빛을 눈에 담아내던 이는 의자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킨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운 나비 박제본과 조각상을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려 눈앞의 캔버스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광기의 시간이다. 갈색 물감 머금은 붓을 캔버스 위로 미친 사람처럼 강렬하게 움직인다. 나무색으로 빚은 보름달이라.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안에 피보다도 붉은 눈이 번들거리는 광기를 머금고 매끄럽게 굴러다닌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미쳐버린 사람처럼. 그림을 그릴 때면 아득한 고양감에 정신이 아찔하게 흐드러지는 것만 같은 착.. 2024. 4. 18. 흙먼지와 풀내음. 발걸음이 천천히 빨라진다. 처음은 그저 걷는 느낌이었으나, 머지않아 뛰는 형태에 가까워졌다. 몸 주위에 연푸른 선이 감기는가 싶더니, 곧 인간이 낼 수 없는 속도로 뛰며 높이 뛰어오른다. 무너져가는 건물 틈새로 몸을 굴리듯 빼내곤 지면에 발을 딛고 선다. 어두운 밤하늘색의 중단발 머리칼이 흙먼지 섞인 바람에 나부낀다. 차가운 밀빛의 눈이 그 풍경을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작은 핸드폰을 꺼내든다. "내부 크리쳐 처리했어요. 정보도 전송 완료했고요. 건물 무너지는 건 뭐... 어차피 무너질 거였으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으시고." 이번 일도 깔끔하고 좋네요. 수고했어요, 첼시. 단골손님이라 조금 더 신경 썼어요. 서로 웃으며 통화를 이어갔지만 통화가 끝나고 나서는 표정이 돌변했다. 이번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2024. 4. 15. 잔해와 기계.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4. 11. 오로지 순백의.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위협이 뒤따른다. 특히나 이런 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세상에 자신을 내던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엘은 그런 세상 속에서 어딘가를 바라본다. 하늘도 땅도 아닌 저 멀리 어슴푸레 물든 곳. 엘의 시선은 항상 그런 알 수 없는 곳을 향했다. 하얀 베일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채로, 입만 겨우 보이게 깊이 내리고 걸음을 옮긴다. 그것이 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알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엘은 온통 하얀색으로 얼굴을 가리고 피부를 숨겼다. 조금 더울지도 모를 곳에서도 덥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 방어막 전개하세요. 곧 시작됩니다." 엘이 읊조리듯 말하자 주변에 강렬한 푸른빛을 머금은 방.. 2024. 4. 7. 기적을 노래하며. 헬렌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속에서부터 비릿한 피 냄새가 치밀어 오른다. 어지럽다. 상처투성이의 손으로 바닥을 그러쥐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언젠가의 어린 날에 올려다본 하늘도 이렇게 맑았던 것 같았는데. 헬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가 어깨에 걸쳐줬던 옷자락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옷 챙겨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었다. "..." 마법이란 간절함이 불러오는 기적이었다. 마법을 쓰는 이들은 물리법칙을 거스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헬렌은 꿋꿋하게 서서 앞을 바라본다. 마수와 사람이 한데 엉켜 싸우는 모습이 지옥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헬렌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한. 짧은 이름을 불렀다. 헬렌은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2024. 4. 2. 정적의 그늘. 그의 삶은 늘 고요했다. 고요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고요하다고 느꼈다. 이따금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일평생 지독한 고요함 속에서 살았다. 사실 그것은 고요함이 아니라 외로움 따위의 감정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삶을 고요하다고 느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는 꽤 나쁜 것을 타고났다. 이것저것 끌어들이는 체질을 타고난 것이다. 그건 신병도 아니었고, 기가 약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체질이었다. 사람 외의 것이 달라붙고 사고에 잘 휘말리는 것. 누군가는 저주라고 부를만한 것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곧잘 사고에 휘말렸다. 죽을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천운이 겹쳐 살아남은 것도 체질 덕분이었다. 어떤 큰 .. 2024. 4. 1. 순수(純粹). 세인은 정령이다. 세상의 깨끗함을 사랑하는 순수함의 결정체였다. 으뜸이라고 평가받는 정령 중 하나였다. 정령사 중에서 그를 사역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순수함을 사랑하는 정령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란 온갖 검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 힘이 되어줘." 세인을 소환할 만큼의 힘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람은 다르다.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에 한 번 나타나는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모든 가치를 버리고 하얘지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세인은 그런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만큼 순수한 존재는 없다. 세인은 저를 부른 이의 주변을 가볍게 돈다. 산의 푸르름을 한가득.. 2024. 3. 26.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