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208 칠흑빛 술사. 어둠 짙푸른 밤에는 별의 빛무리가 휘날린다. 마치 칼날과 같이, 고요하게 찾아오는 선율과 같이. 한밤의 달빛을 등지고 있던 이는 천천히 걷다가, 이내 빠르게 뛰었다. 바닥에서 부풀어 오르는 붉은 기운을 보다가 제 몸집보다 큰 쿼터스태프로 바닥을 짚어 그대로 높이 뛰어오른다. 마치 장대를 쓰듯이. 공중에서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떠오른 몸은 높은 바위 위에 가볍게 안착했다. 마치 가벼운 날갯짓 같은 행동에 새카만 망토가 새의 날개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서슬 퍼렇게 빛나는 보랏빛 눈은 붉은 이채를 머금는다. 바닥을 기는 붉은 것은 마물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길게 뛰어오며 바닥에 새긴 선명한 군청색과 보라색의 주술진이 연달아 붉은 기운을 억눌렀다. 기어이 틈을 비집고 기어 나오는 마물은 술사의 쿼터.. 2024. 8. 26. 오로지 상처뿐인 곳에서. 트리거 워닝: 전투노예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가혹행위, 상해, 살해 이 글은 전부 가상의 현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상기 명시된 소재는 현실에서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며, 일어난다고 하면 비극적인 일입니다. 글쓴이는 이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위와 같은 일을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첫 기억의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작은 아이가 세상을 인식할 때부터, 그러니 의식을 가진 순간부터 본 곳은 좁은 감옥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 위생적이지 않은, 오염이라도 된 것만 같은 식수와 딱딱한 빵이나 차가운 스프가 식사가 제공되는 곳. 그것이라도 없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하루에 두 번 제공되는 식사를 받아먹고, 어떤 시간이 되면 무거운 문이 열린다. 눈앞.. 2024. 8. 25. 도깨비의 하루. 그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이 자주 쓰고 손을 오가던 물건에 혼이 깃들어 도깨비가 된 존재였기에, 그는 태생부터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는 늘 인적 드문 길을 오가며 사람들을 위협으로부터 지켜 주었고, 사람들은 그런 도깨비를 좋아했다. 잘 익은 벼이삭 빛깔의 긴 머리카락은 순풍에 흔들리고, 이따금 황금의 이채를 머금고 반짝거리는 연한 빛의 눈은 늘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느른한 미소는 언제나 여유가 가득했고, 그런 여유는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불러왔다. "으앗! 무슨-" "어이쿠, 미안! 위험한 게 있어서 말이야." 사람 하나를 달랑 들고 있다가 조심히 내려놓는다. 검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 스산하게 기어가다 도깨비가 피운 황금빛 불꽃에 휩싸여 사라진다. 조심해, 여긴 위험한 .. 2024. 8. 24. 초혼 招魂: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 모든 물질적인 것은 의식의 세계에 존재하며, 모든 비물질적인 것은 무의식의 세계에 존재한다. 두 세계는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무의식은 의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존재하기에 성립되고, 성립되기에 인식된다. 다만 사람의 뇌는 받아들이는 데에 명확한 한계가 있어 어느 세상도 완벽하게 알아챌 수 없다. 그렇게 알아챌 수 없는 것은 꿈이 된다. 아주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그리고 어느덧 눈치챈다면 그 꿈의 세계는 지척에 와 있다. 사람들은 꿈의 세계에 저도 모르게 들어오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꿈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며 금세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곤 하지만, 간혹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하지 않고, 기억되지 못한 자들이.. 2024. 8. 23. 청소합시다!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큰 한숨부터 쉰다. 단발을 약간 넘는 청록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양동이와 대걸레를 든다. 그러고 보니 지사에 사람 하나가 온다고 했는데. 잠시 시선을 굴리다가 발자국 소리에 뒤돌아본다. "아, 안녕하세요! A-6 지사에서 발령 나서 오게 됐습니다." "안녕! 후배님이라고 불러도 돼? 내가 엔간해선 이름을 잘 안 불러서 말이지."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사람 좋은 미소를 본 이는 잠시 의문을 가진다.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게 편하지 않나?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렇다면 저는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어, 상관없어! 야, 너, 같은 거나 멸칭만 아니라면. "그건 그렇고, 기계 사용 방법은 알아? "아, 대부분 배우고 왔어요! 조금 미숙할 수는 있지만 열.. 2024. 8. 21. 최후의 사진작가. 이 세상은 무너졌다. 국가 간의 경계는 허물어졌고, 법률은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수많은 인종이 사라졌다. 차별하던 사람, 차별당하던 사람, 절망하던 사람과 구원을 찾는 사람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 이 세상은 천천히 인류의 멸망을 향해 움직인다. 다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평화를 불러왔다. 인종의 구분이 없으니 깊게 새겨진 차별이 사라졌고, 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으니 혐오도 없으며, 법률이 없으니 범죄도 없다. 세상의 끝자락에 남은 마지막 인류는 고요한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고요한 종말은 이윽고 평화를 뜻했다. 그 끝자락에 있는 사람 중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오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지금까지 작동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주기적으로 관리했기에 큰 문제없이 잘 .. 2024. 8. 20. 넘어지고 마는. 이 세상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평화도, 관념도, 균형도 이미 잔뜩 기울어진 채였다. 기울어진 세상 위에서 발을 딛노라면 넘어져서 다치고 만다. 칼렌은 그런 세상이 싫었다. 왜 모든 사람들은 기울어진 평화를 원하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고. 칼렌이 혼자서 몸을 웅크리고 표정을 찌푸리고 있노라면 그의 형제가 와서 손을 내밀어준다. 칼렌, 표정이 안 좋아. 괜찮아? 어린 칼렌은 그것이 다정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괜찮아, 누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 말에는 또 나직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칼렌의 형제, 그러니까 누나인 플론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좋은 학생, 좋은 자식, 좋은 친구. 좋은 가.. 2024. 8. 19. 덧없는 것. 모든 것은 사라진다. 영원한 것은 없다. 티끌 같은 희망을 아무리 손에 그러쥔다 해도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찰나의 안온에 매달리지 말고, 증오로 살아가지 말고, 어리석음에 눈멀지 말고, 그럼에도 내던지지 말고... 덧없는 것들에 의미를 새기는 것은 미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련함으로 빚어진 자는 빚어진 대로 살 수밖에 없었다. 아카는 우연히 다른 세계에 발을 디뎠다.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칠흑색의 긴 머리칼은 매서운 바람에 흔들리고, 탁한 잿빛의 눈은 애매한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도자기로 빚어놓은 듯한 발이 바닥에 닿는다. 눈이 밟히며 뽀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이킨 숨에서 비탄이 느껴졌다. 세상의 지식으로 살아가는 이는 공기 중에 떠도는 모든 지식을 읽었다. 이 세상의 지식에서는.. 2024. 8. 18. 선명한 푸름은 자유이니. 삶은 덧없다. 그 안에 깃든 푸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오로지 투쟁하며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약속이야. 그날까지 함께하기로. 짙은 푸름 아래 검은색 머리칼과 짙은 갈색 머리칼이 한데 어우러져 바람에 흐드러진다. 흔한 들꽃도, 예쁜 옷도 없었으나 짙푸른 자유가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맹세였다. 서로를 빤히 들여다보던 선명한 청색의 눈과 부드러운 분홍색의 눈이 곱게 휘어진다. "영원히 사랑해." "나도, 영원히 사랑해." 가볍게 이마를 맞댔다. 가을의 바람이 청량하다. 시민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들은 남몰래 결혼식을 올린다. 시원한 바람소리가 음악을 대신한다. 아, 자유롭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자유로워. 이 세상의 유일한 사.. 2024. 8. 17. 겨울의 종말. 류연은 창을 움켜쥐었다. 대의 끝에 만들어낸 창날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게 일렁거린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피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토할 것만 같았다. 숨을 내쉬는 것이 버거웠다. 찢어진 상처 사이로 흘러드는 한기에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이렇게 아픈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통증만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다 풀려버린 보랏빛 머리카락이 피를 머금고 반짝였다. 고대 마물이라는 것은 갑자기 깨어났고, 그것을 막기 위해 많은 용병이 동원되었다. 고대 마수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대로 의식이 붙어있는 것은 그밖에 없었다.류연은 어느 상황에서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물러.. 2024. 8. 14. 이전 1 ··· 3 4 5 6 7 8 9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