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208 그리고, 우리는 없었다. 말소당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릴없이 사라지고 찢어발겨진다. 살아있었으나 살아있지 않았고, 틀림없이 존재했으나 존재한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의미마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없이 많이 피어오른 꽃들 중 한두 개쯤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아스포델은 딱 그 정도의 위치였다.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 단지 태어날 곳을 고르지 못했기에 마계의 독에 노출된 꽃에서 태어났으니, 그것이 치명적인 결함이 되었다. 꽃에서 태어나는 신비로운 종족이었으나 그런 이들이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또다른 이야기였다.세상에 피어난 꽃은 아름다움보다도 슬픔을 더 크게 알았다. 가장 신비롭게 만들어진 존재가 세상의 슬픔만을 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은 애틋함.. 2024. 7. 14. 暗黑. 안개와 암흑이 짙푸르게 내리깔린 곳에는 수많은 혼이 떠돈다. 네 살이 조금 넘은 혼부터 스물일곱이 조금 넘는 혼까지. 오로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은 이들의 혼이 안갯속을 길게 배회한다. 어느 곳 하나 연고도 없던 아이들은 서로의 절실한 이해자가 되기도 하였고, 가족이 되기도 하였다. 살아생전 슬픔과 고통만을 느끼던 이들은 죽고 나서 서로의 손을 마주 잡는다. 그리고 그런 혼들이 모여있는 곳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의 혼이 있었다. 담녹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과 붉은빛 눈은 이제 전부 빛바래 희미하게 빛났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모습을 가진 혼은 다른 혼들을 가족처럼 여겼다. 같은 고통을 겪으며 죽은 이들을 모두 안아주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지지자였던 이는 그에게 주어진 명.. 2024. 7. 13. 光明. 세상은 온통 밝다. 빛이 가득한 거리, 상냥한 말소리, 부드러운 음악.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고요하고 내리쬐는 햇살은 청초했다. 다만 그 이면에는 부도덕함이 가득했으니 광명이란 재앙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명은 집안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것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무어라 해야 할까? 한 집단에서, 한 커다란 마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이가 뒤로 행하는 모든 부도덕한 일들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신, 재앙 따위를 인간의 손으로 빚으려 수많은 이들의 피로 물들인다. 자신의 분신이라 칭하는 아이를 그저 대체품으로 여긴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새하얀 수의와 같은 옷을 입히고 집안에서 사육하듯 키웠다. 제 아이를 위해서. 정확히는, 제 아이에게 행할 수많은 실험을 위해서... 그 아이를 위한 것도 .. 2024. 7. 13. 살고 싶은 이의 □□. 하늘에 뿌연 구름이 꼈다. 잔뜩 마른땅에 비가 오려나 싶었다. 서부에는 비가 잘 오지 않았으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가족 중 한 명은 바깥으로 나갔고, 다른 한 명은 집의 창문을 닫았다. 비가 올 것을 대비해 미리 닫아두는 것이었다. 아직 어렸던 소피엔은 다른 어른들을 보곤 방의 창문을 닫았다. 비가 오는 것은 좋았지만 너무 많이 오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찰나에 큰 창문 하나가 창틀째로 뜯겨나가 산산이 부서졌다. 바닥에 큰 몸집을 가진 마물이 움직였다. 마물을 제대로 본 것이 처음이라 잔뜩 굳어있을 때 다른 사람 한 명이 무어라 말했다. 어서 집을 벗어나라고. 바깥으로 나가서 시내로 가라고. 무조건 앞만 보고 뛰라는 말이 하릴없이 흩어졌다. 눈앞에서 사람의 복부가 뚫려 그대로 바닥에 축 .. 2024. 7. 11. 건조한 바람의 향기. 광야에는 늘 건조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곳의 바람은 북부만큼은 아니겠으나 꽤 매섭다. 햇살을 받으면 맑은 푸른빛으로 빛나는 검푸른 장막빛의 머리칼이 느릿하게 흔들린다. 꽃이나 풀의 싱그러운 향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곳. 소피엔은 그런 광야를 바라본다. 눈을 굳게 감고 있었으니 그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누군가가 그를 부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햇살을 받은 의체가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곱게 반짝거린다. 발걸음 소리는 단단한 땅 위에 잘 빚어놓은 도자기가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와 같았다. 소피엔은 허공에서 손을 가볍게 움직인다. 마치 글자를 입력하듯 부드럽게 손을 움직이다가 손을 내렸다. 찾으셨나요? 부드러운 음성까지 함께 출력되는 것을 보면, 소피엔이 어느 정도로 사려 깊은 사람인지.. 2024. 7. 10. 여름 저녁의 재즈. 후덥지근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집 한편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았다. 네이시는 피아노 위에 손을 가벼운 선율을 연주한다. 아주 훌륭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아주 어색한 정도의 실력도 아니었다. 새로 배운 피아노 음악이었는데 네이시의 마음에 꼭 들었다. 좋은 음악을 들으니 사랑하는 이가 생각났다. 달프도 좋아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니 만나고 싶었다. 오래간만에 마중을 나갈까- 그런 생각을 하고는 바깥을 잠시 내다본다. 얇은 커튼이 바람에 나부낀다. 복숭아빛 햇살이 바닥에 내리쬔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제 연인이 퇴근할 시간이었다. 지금쯤 나가면 중간에 만날 수 있으려나? 네이시는 한껏 들뜬 마음으로 피아노 위에서 손을 떼고 집 밖으로 나선다. 햇살도 바람도 뜨겁다. 뜨거운.. 2024. 7. 9. 가장 소중한 추억. 사랑하는 나의 아이에게. 아가야, 언제까지고 너를... 가장 소중한 추억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함으로 가득 차있는 것, 함께하던 피아노 소리, 마주 잡은 손에서 퍼지는 온기, 슬픔마저도 기쁨으로 변질되던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기억이 '가장 소중한'이라는 수식어가 떨어져 버린 것은 분명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버리고 아이와 단둘이 남아버린 현실은 가혹했으나,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이어지고 끈질기게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반려와 함께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아쉬운 일이었으나 또한 아이와 함께 애틋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 시대를 향유하던 극작가는 본인의 본명이나 업적을 칭송하던 것보다 엄마라는 호칭을 더 마.. 2024. 7. 7. 세상은 인형극이었으니. 리네이스 피오니는 흔히 말하는 아가씨와 같은 사람이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걱정 하나 없을 것 같은 삶을 살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을 정도로, 걱정도 무엇도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피오니는 세상의 이면을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피오니는 자신에게 있는 돈을 허투루 쓰는 법 없이 잘 모아두었다가 자선사업을 펼쳤다. 다만 피오니는 이 세상에 퍼져있는 악에 대해 몰랐고, 그래서 편협한 선행을 행했다. 진심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만연한 악에 의해 짓밟히는 줄도 모르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피오니는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눈을 통해서 본다면.. 2024. 7. 5. 우리들은 설원에서 노래하네. 생존 IF. 릴리 고어틱한 표현주의 (신체결손 등) 숨이 차갑다. 설원의 향기가 매섭도록 휘몰아친다. 온몸이 뒤틀리는 감각뿐만이 정신을 명료하게 해 준다. 릴리는 자신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죽지 않았어... 고대 마수의 공격을 그대로 반사해 내기 위해 생명력을 쏟아부었으나 죽지 않은 것은 어떤 기적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온몸이 찢어지고 뒤틀리는 감각 속에서 겨우 몸을 지탱해 바로 앉고, 양손을 바닥에 댄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이 설원에서 녹음 가득한 마력이 퍼져나가 방어막이 둘러진다. 손끝이 떨려온다. 아직 죽지 않을 수 있다. 더 버틸 수 있어. 살아남은 이들의 주위에 방어막이 둘러진다. 이후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쪽 팔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 2024. 7. 4. 별빛이라 여겨진 사람. 별의 현신이라 불렸던 이가 있었다. 천재라 불렸으나 늘 노력했고, 다정하며 겸손했고, 어려운 사람을 쉬이 지나치지 못하고 늘 손을 내밀던 사람이었다. 이 세상 가장 높이 떠있는 백색 별을 황금으로 만들어진 불꽃에 녹여 사람의 형태로 빚어낸다면 필시 이런 모습일 것이리라. 수많은 사람들이 헬렌을 보고 한 생각이었다. 그는 그러한 생각만큼 아름다운 이였다. 겉모습도, 그 모습 안에 품은 마음도 그랬다. 헬렌 리시안셔스는 붉은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이 붉은 것이 아니라 제 시야가 붉은 걸까? 느릿하게 눈을 꿈뻑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육신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어이 일어난 것은 별빛을 닮은 강인함이었고,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으며, 또한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마법은 간.. 2024. 6. 30. 이전 1 ··· 6 7 8 9 10 11 12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