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373 선명한 푸름은 자유이니. 삶은 덧없다. 그 안에 깃든 푸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오로지 투쟁하며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약속이야. 그날까지 함께하기로. 짙은 푸름 아래 검은색 머리칼과 짙은 갈색 머리칼이 한데 어우러져 바람에 흐드러진다. 흔한 들꽃도, 예쁜 옷도 없었으나 짙푸른 자유가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맹세였다. 서로를 빤히 들여다보던 선명한 청색의 눈과 부드러운 분홍색의 눈이 곱게 휘어진다. "영원히 사랑해." "나도, 영원히 사랑해." 가볍게 이마를 맞댔다. 가을의 바람이 청량하다. 시민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들은 남몰래 결혼식을 올린다. 시원한 바람소리가 음악을 대신한다. 아, 자유롭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자유로워. 이 세상의 유일한 사.. 2024. 8. 17. 들녘의 백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해가 지지 않는 곳이 있다더라. 해가 지지 않으면 모든 부패가 모두의 눈에 보이게끔 드러나지 않을까. 문득 내뱉은 말에 그의 곁에 서 있던 호위무사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곱게도 웃는 소리를 흘린다.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려진 탓이었다. 큰 의미 없이 해본 말이니 신경 쓰지 말아. 초목의 빛을 그대로 담은 고운 눈 안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외로움 같기도 했고, 슬픔 같기도 했으며, 또는 애석함 같기도 했다. 길게 뻗어 내려오는 흑단 같은 머리칼이 어슴푸른 달빛을 머금고 옅게 빛난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는 그의 눈보다 짙은 수풀이 무성하고, 밤하늘은 몇 번이고 색을 먹인 검푸른 비단처럼 너울댄다. 여름 끝에 걸친 밤바람.. 2024. 8. 16. 겨울의 종말. 류연은 창을 움켜쥐었다. 대의 끝에 만들어낸 창날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게 일렁거린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피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토할 것만 같았다. 숨을 내쉬는 것이 버거웠다. 찢어진 상처 사이로 흘러드는 한기에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이렇게 아픈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통증만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다 풀려버린 보랏빛 머리카락이 피를 머금고 반짝였다. 고대 마물이라는 것은 갑자기 깨어났고, 그것을 막기 위해 많은 용병이 동원되었다. 고대 마수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대로 의식이 붙어있는 것은 그밖에 없었다.류연은 어느 상황에서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물러.. 2024. 8. 14. 물빛 초목. 푸른 호수가 존재하는 푸른 숲에서는 맑은 빛의 초목이 자란다. 그런 초목은 부드러운 빛을 머금고 마음껏 반짝인다. 초목에서 태어난 정령은 늘 밝은 빛을 머금고 곱게 빛난다. 맑은 하늘이 투명하게 비치는 에메랄드빛 호수의 색을 그대로 담은 머리카락에서는 상쾌한 물결의 향기가 났고, 수레국화의 빛을 가득 담아낸 깨끗한 눈에서는 파도 향기가 풍긴다. 깨끗하고 투명한 물을 머금고 자라난 초목의 정령은 자연을 사랑했다. 자연의 강대한 힘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여린 들풀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는 사람을 무서워했다. 사람은 자연을 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한 번은 정령인 그에게 손을 뻗은 적도 있었다. "메르, 괜찮아?!" 초목의 정령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정령에게까지 손을 뻗는.. 2024. 8. 13. 넘어질 것만 같은.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은 이미 잔뜩 기울어져 있어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 말이다. 사실 이 세상은 그 어떠한 것도 공평하지 않았다. 불공평만이 유일한 공평함으로 작용한다. 누군가는 행운이라고 생각한 삶이 사실 감옥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허무감은 말로 다할 수도 없을 것이다. 플론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가끔은 사는 것에 숨이 막혔다. 좋은 학생, 좋은 자식, 좋은 친구.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남는 것은 쉬웠지만 스텔라 플론, 그 자신으로 남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어둑한 방 안에서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누군가는 플론에게 행운아라고 했다. 힘듦 하나 겪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게 됐다고. 누군가는 플론에.. 2024. 8. 13. 잊을 수 없는.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망각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히고, 지워지고, 또는 추억의 형태로 덧씌워지곤 한다. 망각이 신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삶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그 어떠한 것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설령 아무리 끔찍한 악몽이라고 할지라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망각이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한다. 아무리 속을 찢어발겨놔도 잊을 수 없다. 소피엔은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완전기억능력은 아주 편리하면서도 굉장히 불편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부끄러운 것, 잔인한 것조차 잊을 수 없었다. 가끔은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그러지 않았던 것은 분명 텅 빈 것에 대한 공포심 때문일지도 .. 2024. 8. 12. 상처투성이의.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는 군인이었고, 그저 주어진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하면서, 적을 철저히 압살할 뿐이다. 그것에는 이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약함인지, 다정함인지, 혹은 이기심인지. 혹은 전부 다인지... 알 수 없다. 앞으로도 평생 알 수 없을 성싶었다.밤에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그리하여 밀려오는 슬픔은 잔혹하여. 달빛을 받아 어슴푸레 빛나는 암녹색 머리칼이 흘러가는 바람에 물결친다. 긴 머리칼을 넘기려는 행동조차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한 사람 앞에 자세를 낮추고 상대를 슬 바라본다. 온갖 상처를 주.. 2024. 8. 11. 이야기는 다정함을 머금고. 윤슬은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다 짧은 한숨을 내쉰다. 이제 기껏해야 16살인 윤슬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은 그 나잇대의 학생들이 하는 고민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학교는 일찍이 자퇴했으나 모두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해 학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지인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있고, 조금 더 친밀한 관계를 쌓은 사람도 있었다. 일찍부터 프로그램을 만지는 것이나 무언가를 써내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에도 소질도 있는 편이어서 이른 나이부터 게임 개발과 디자인 쪽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니 누군가의 지원 없이도 충분히 돈을 벌어 혼자서 잘 지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은 늘 게임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이야기를.. 2024. 8. 9. 자유를 위하여. 꽃이 피어나 화사한 계절이 돌아온다. 온갖 꽃들이 정신 사납게 피어난 날에는 꼭 그 향기에 묻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설화는 제 앞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을 본다. 온갖 독이 역겨운 향을 풍기며 뒤섞인다.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투명한 초목빛의 눈이 무감정하게 그것을 바라본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알았다. 이 집안사람들은 서로를 증오하기에 급급했으니까. 마치 살아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증오라도 되는 것처럼. "이 독, 네 것이 맞느냐?" 설화는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 독은 설화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건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사람을 죽이고 난 이후에 그 죄를 뒤집어쓸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죽은 자는 독살당한.. 2024. 8. 8. 슬픔은 바람과 함께. 안갯속의 숲은 늘 고요했다. 어떠한 것도 없이 정체된 곳. 안개는 외부로부터 내부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나 본질은 달랐다. 안개를 만들어낸 자는 안갯속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이 소중했고, 모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었다.휘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닌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진다. 그것은 긴 시간동안 함께한 절망감이었고, 혹은 누군가의 죄악마저 짊어지고자 하는 이타심이었다. 광명이 가득한 세상은 부도덕함이 가득했으며, 암흑이 가득한 땅에는 슬픔이 넘실거린다. 누군가의 비탄이나 절망감처럼. 문득, 물기 섞인 바람이 뺨을 두드린다. 휘는 그 불온한 것을 알고 있었다. 걸음이 빨라진다. 체력이 닳을 일이 없었으나 숨이 빠르게 차는 기분이었다. 몸속에 무언가가 들이차는 느낌. 감정이 일렁거린다. 숲의 안개가 짙.. 2024. 8. 8. 이전 1 ··· 5 6 7 8 9 10 11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