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

오랜 시간이 지나.

@Zena__aneZ 2024. 12. 28. 17:56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난다. 이 근방에서 유독 마물이 많이 나온다 했더니, 강한 마물에게 이끌려 일어난 현상이었구나. 예상한 범위 안이긴 했지만. 펜비는 허리춤에서 막대 하나를 꺼냈다. 검은 보석에서 기묘한 빛무리가 감돌더니, 이내 막대의 양쪽 끝에 기다란 검날이 생긴다. 선명한 파란색이 우아한 선으로 뻗어나가 마법 회로의 형태를 띠고, 곧 쌍날검 위에 자리 잡는다. 잠시 발을 가볍게 구른다. 파란 진동이 퍼졌다가 사그라든다.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가볍게 몸을 풀다가 발돋움한다. 마치 강렬한 물살을 타고 움직이듯 자연스럽게. 강렬하게. 한치의 어긋남도 흐트러짐도 없이. 파란 마법의 궤적이 마치 네온사인의 빛처럼 번뜩인다. 이제는 손잡이가 된 막대의 주위로 가시줄기 같은 형태가 반짝이고, 그대로 우악스럽게 밀어붙여 크게 휘두른다. 공중에 그려진 긴 선형을 따라 옅은 진동이 퍼졌고, 제법 거대한 마물은 보기 좋게 갈라졌다. 방어진을 펼쳐 마물에게서 쏟아지는 독액을 막고는 통신기기를 들어 연락을 취한다.

 

"회수자님, 네, 펜비예요. 세이렌을 잡아서요. 다른 마물도 꽤 있어요. 그리고..."

 

사람의 기척. 일단 급히 와달라는 말을 남기고 통신을 끊는다. 이곳은 잘 쓰지 않는 길이긴 했어도, 사람이 아예 안 다니는 길이 아니었다. 길을 먼저 통제부터 했어야만 했는데. 여긴 위험해요! 뒤로 물러나─ 입안에서 말을 잘게 짓씹다가 빠르게 날아간다. 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눈부신 빛의 방벽을 펼친다. 견고하게 펼쳐진 방어막 뒤쪽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설마, 벌써 다친 건가? 고개만 슬 돌려 살펴본다.

 

"... 펜비."

 

아. 일순간 방어막에 얕은 금이 갔다. 바닥에 꽂은 검을 뽑아 들고 그대로 마물을 갈라버린다. 숨을 한 번 내쉬곤 검날을 없애곤 손잡이를 다시 허리춤에 달린 끈에 매어 놓았다. 모셔다 드릴게요, 어머니. 제 손을 잡고 일어나세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이는 펜비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운명이란 대체 어떤 것인지, 무슨 장난인지... 위험지대에서 벗어나자 목소리가 들렸다. 펜비, 잘 컸구나. 무언가가 치고 올라오는 감각을 느낀다. 펜비의 표정은 그저, 아무것도 없었다. 방어막에 금이 간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잘 컸다는 말에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펜비의 이름을 읊었던 이는 조용한 말을 다시 건넸다. 집에 오지는 않을 거니? 네.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리고 돌아간다니, 우습지 않나? 애초에 집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머무를 곳이라고 여긴 적도 없었다. 그에 따라 돌아갈 곳도 없다.

 

"펜비, 네가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어머니, 제가 치유술을 배우던 건 약자를 억압하는 자들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14살도 채 안된 아이가 집을 도저히 머무를 수 없는 곳이라고 여긴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혐오를 가르치던 것도, 누군가를 억압하던 것도,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던 것도 싫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그만두었다. 치유술을 그만두었고, 그 대신 방어술을 익히고 검술을 배웠다. 가족은 펜비를 외면했고, 펜비도 학습된 혐오를 외면하고 떠났다. 지키기 위해서. 오로지 그것만이 펜비의 동기였다. 저는 제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요. 하지만 눈앞에 도울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설령 그게 악인일지라도. 누군가에게 가혹하고, 학습된 혐오에 말라가면서도 쳐낼 수밖에 없던 사람일지라도... 먼저 손을 뻗겠다고.

 

"큰 길목까지 동행하겠습니다."

 

"... 고맙구나."

 

얼굴에는 다시 평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난날의 슬픔이 사라진다. 이제는 그리 슬프지 않은 것을 보니 긴 시간이 지났겠거니 싶었다. 펜비는 큰 길목까지 다른 사람을 데려다주고 다시 할 일을 하러 떠났다. 마치 아무런 미련 없이 집을 떠나던 순간처럼. 뒷모습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