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

그림자가 일렁이는 여명

@Zena__aneZ 2025. 1. 6. 20:03

문득, 눈이 부시다는 착각이 일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곳의 풍경은 정갈한 도시의 모습이었으나, 그 안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아니라. 그러한 평온함이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찢어질 듯한 소음과 적막함, 또는 미약한 부드러움과 활기로 살아남은 자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비슷한 형태에서 정확히 다른 지점을 바라보는 자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별세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도시를 가만히 둘러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등급전을 치르는 지역을 굳이 중앙지역으로 해놓은 이유는 나름의 공정성과 실력의 편차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지역에 따라 나오는 마물도, 마물의 위험도도 다 다르니까. 하지만 궁금한 것은, 대인 전투가 실력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마물을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몸소 겪으며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지속된 시스템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만...

펜비는 잠시 기지개를 쭉 켜곤 제법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간다. 제법 생소한 복장도, 익숙하지 않은 헬멧을 쓴 사람도 많았다. 그제야 등급전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는지 잠시 굳었다가도 이내 긴장을 가라앉혔다. 긴장감이 치고 올라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던 덕분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경쾌하게 느껴질 법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이전에 잠시 대화를 해본 다른 용병들에게 다가가 활기찬 인사를 건네고 솔직하고 담백한 말들을 나눈다. 그런 부드러운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이들도 있었다.

처음 보는 용병인데. 남부 쪽 맞지? 동부 대표의 말에 잠시 시선을 굴린다. 펜비를 유심히 살펴보던 이는 의문을 갖는다. 남부 용병단 소속도 아니었고, 그 주변에서 본 얼굴도 아니었다. 옷은 확실히 남부의 옷이 맞았지만. 서부 대표가 침음을 흘리다가 슬럼가의 자경단 소속인 게 아니냐는 말을 남겼고,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답한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잘 보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아직 앳되 보이는 얼굴이라서 잠깐이라도 봤으면 기억했을 것이었다. 남부 슬럼의 자경단은 용병단이랑 다르니까 못 봐도 이상할 건 없지 않아? 대인전투 보다 보면 알겠지.

 

펜비는 허리춤에서 손잡이처럼 생긴 것을 꺼낸다. 날이 굉장히 짧아 독특한 무기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단순히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선명한 푸른빛의 마나 회로가 공중을 배회하더니 이내 쌍날검이 되었다. 제법 커다란 무기를 양손으로 잡고 있던 자의 새파란 빛이 깃든 영롱한 눈과 마나 회로가 내부 조명에 선명하게 반짝였다. 몇 번의 대인전과 한 번의 다인전을 치르고 나서 배지를 받았다. 맑은 녹색을 머금은 배지는 언뜻 푸른 끼가 감돌았다.

 

"다음 등급전에서 완전히 1등급이 되겠는데?"

 

"아, 그래요? 그럼 녹색이 2등급인 거예요?"

 

"녹색이 2등급, 연파란색이 1등급이야. 3등급은 노란색!"

 

처음 했을 때 바로 2등급이 나온 거면 자랑해도 좋을 실력이라고, 그렇다면 바로 돌아가서 자랑해야겠다는 말이 오간다. 잔뜩 긴장한 것 치고 결과가 좋았다. 다음 등급전이 기다려진다는 말에 같이 대화를 나누던 용병들이 질색을 했지만. 매번 하다 보면 귀찮아질 때가 올 거라면서. 하지만 펜비는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이내 손을 흔들고는 남부로 돌아가는 이동 장치에 몸을 실었다. 집에 가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말해야지. 눈을 감았다. 약간의 부유감이 지나가고 눈을 뜨니, 눈앞의 풍경이 달랐다. 예비 이동장치. 기존의 장치가 망가졌을 때에나 작동하는 것이었다.

순간 불온한 감각이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검은빛이 드리워지는 파란 하늘이 지나치게 어둡다는 착각이 일렁거린다.

 

그러나 착각은 더 이상 착각이 아니었고, 불온함은 그저 잘 빚어진 감정이 아니었다. 마치 앞날을 내다본 것처럼. 불길이 일렁거렸고, 마물이 길가를 돌아다녔으며, 끔찍한 시취가 코를 찔렀다. 한순간 정신이 마비되었다. 발아래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식물형 마물과 어인이 한데 뒤엉킨 모습이 지옥의 한 풍경과 같았다. 펜비가 멍하게 서있다가 겨우 움직였다. 어떤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비탄이 흐르는 이 땅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펜비가 가장 처음 배운 것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움직일 것. 혹여나 이길 수 없다면 물러날 것.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허무하게 기다리기만 하지 말 것. 펜비는 정신을 차리고 아직 살아있는 이들을 구했다. 배운 대로. 과거에 후회한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쌍날검 위에 자리 잡은 선명한 푸른 회로가 꺼질 듯 깜빡거릴 때까지. 누군가가 펜비의 곁에 왔다. 다른 용병인가? 물어볼 정신도 없이, 차마 울지도 못할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움직이다가, 가만히 서서 폐허를 바라봤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울음소리도, 비명소리도, 무언가가 타는 소리도, 마물이 뒤엉켜 내는 끔찍한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적막이다. 고요다. 많은 사람이 살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펜비는 아가미 달린 사람처럼 그저 입을 뻐끔거리다가 굳게 닫았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산 사람이 더 많았다. 한 명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이 살았다. 하지만 펜비의 가족과 다름없는 이들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가능성이 있다. 진작에 도망쳤거나, 마물의 먹이가 되었거나, 바다 밑으로 끌려들어 갔거나... 그 많은 가능성 중, 가족이라고 여긴 이들이 마물의 먹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왜냐면, 그런 사람들이니까.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죽을지언정 도망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펜비가 가장 잘 알았다. 고개를 느릿하게 흔들다가 불타고 남은 것을 보았다. 배운 대로 움직였어요. 사람들의 손을 잡았어요. 옛날 같았다면 한 명도 구하지 못했을 텐데. 새파란 눈이 창공처럼 투명했다. 쌍검날을 잡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잔해들을 살폈다. 타다 만 천조각이 재가 되어 흩날린다. 검은빛이 드리우는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었다가, 이내 황금빛으로 일렁거렸다.

아, 새벽이다. 죽은 자들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가장 어두운 시간이 지나간다.

검고 푸른 밤의 장막이 흘러간다.

여명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