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 됐다, 됐어!! 내가 만들었어~!"
그 기기가 처음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눈부실 정도로 화사한 은빛의 머리카락과 푸른빛의 눈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 여성은 연구복 위에 목도리도 두르고, 장갑도 끼고 있었다. 화사한 웃음이 여성의 피로감을 깨끗하게 가려주는 듯했다. 그 기기는 눈을 깜빡였다. 눈을 뜨기 전부터 수많은 정보가 입력되어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기계의 감정이라는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입력된 대로 말했다.
"휴머노이드 기기 LN-001, 작동 시작합니다."
"안녕~!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본 기기를 만드신 L 박사님이십니다."
"맞아, 내가 널 만들었어! 음~.. 널 만든 이유는, 이미 알겠지만 다시 말해줄게. 네 일은 나의 보조야. 난 지구를 위한, 그리고 아픈 이들을 위한 약을 만들어야 하거든."
L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기는 그 말에 어떠한 것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말을 듣고, 들어온 정보 -생각- 를 정리할 뿐이었다.
L의 말에서, 그리고 미리 입력된 정보로 알 수 있듯 지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지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구에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L은 도저히 제 고향을 떠날 수 없었고, 언제라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푸른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제 손으로 망친 자연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L은 아픈 자연을 위해 부지런히 약을 만들었다. 하지만 느리게 지쳐가고 있었고, 결국 지쳐가는 몸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기계 하나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LN-001 기기였다.
"난 L이야. 그리고, 너는 LN이고. 내가 처음 발명한 기계에 비슷한 이름을 붙이는 거, 낭만적이지 않아?"
"이름이 유사하다면 두 인물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음~, 그래도! 난 역시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이름을 지어주는 건 아주 특별한 것이잖아?"
L은 LN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둘이 같이 나가서 본 지구의 풍경은 황폐했다. 바다 위에는 온갖 오염물로 가득했고, 바닥의 흙은 퍼석하게 메말라있었다. L은 그 풍경을 바라보다 LN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지구를 꼭 보여주겠노라고. 흰 목도리가 매캐한 바람에 흔들렸어.
그날 이후로, L은 열심히 약을 만들고 LN은 다른 기기들과 함께 약을 대지 위에 뿌렸다. 오염물은 다른 기계들이 수거해 처리했다. LN은 탐색형 휴머노이드로,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안전지대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L은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LN 모델을 복제하지 않았다.
"박사님. 본 기기를 더 만들지 않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몸체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복사하면.."
"난 네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걸? 그러니까 하나만 있는 게 맞지."
"부정합니다. 휴머노이드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낭만적이잖아."
L은 LN의 어깨에 기대고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흰 목도리는 조금씩 더러워졌고, 지금은 군데군데 먼지가 묻어있어.
"있지, LN. 내 부모님은 전부 과학자셨어. 지구를 복원하려다- 오염물질에 노출돼서 돌아가셨고."
"..."
"나도 곧 그렇게 될 거야. .. 하지만, 나... 아름다운 지구를, 보고 싶은걸."
"..."
"엄마와 아빠가,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랑했던 그 세계를.."
기침이 터져 나왔다. 오늘은 너무 열심히 돌아다녔나 봐, 그리 웃으며 말하는 L을 바라보는 LN의 표정은 어땠을지, 자기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L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LN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박사님. ...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자신도 놀라고 말았다. L은 그저 웃었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LN의 눈에 슬픔이 담겼다. L은 곱게 웃으며 그를 가볍게 끌어안아주었다. 기계가 감정을 느낀다니, 참 신기하지. 그 감정을 잘 기억해 줘. 그것에 네가 살아갈 원동력이 될 테니까. 그렇게 속삭여주던 이는 하나의 꽃과 같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두운 잿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새카만 두려움이 물러났다. 바닥에는 꽃이 피어나고, 한편에서는 옅은 바다의 향기가 몰려온다. L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LN은 그녀의 곁에 있었다.
"... 설마, 이걸 진짜.. 내 눈으로 볼 줄은 몰랐어."
자그마치 7년이다. 금방이라도 스러져버릴 것만 같던 L의 생명은 신기하게도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버텨나갔다. 너무나도 보고 싶은 풍경이 있어서 그런 걸까, 알 수 없었다. 그저 기적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하나, 기적이라고 해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버텨오긴 했으나, 이젠 명백한 무리였다.
"... 저기, LN. 나, 바다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이제는 홀로 걷지 못한다. 오염물질로 팔도 망가졌고, 눈도 흐리게 보인다. 멀쩡한 곳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서 이 순간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L을 안아 들고 있는 LN의 표정은 밝지 못하다. LN은 그럼에도 L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어렴풋한 슬픔과 벅찬 기쁨을 느낀다.
"LN, 전에 네가 물어본 적 있잖아. 왜 이름이 LN이냐고."
"네."
"그거, 내 진짜 이름이야. 리엔(Lien). .. 사실, 난 내 이름을 별로.. 안 좋아했어. 부모님은 늘 바빠서 내 이름을 잘 못 불러줬거든. 그런데, 난 내 부모님이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널 만들면서 결심한 게 있어. 나만큼은 내 이름을, 그리고 세상에 태어날 너를- 절대 소홀하게 대하지 않고.. 마음껏 사랑해 주겠다고."
나와 똑같은 머리카락 색에, 똑같은 눈 색을 가진 기계. 그게 네가 이어받을 이름이야. 그렇게 속삭여주듯 말한 L은 화사하게 웃었다. 리엔은 그것을 보며, 조금 더 힘주어 L을 끌어안았다.
"... 박사님, 저는.. 전, 박사님을 사랑해요."
"응, 알고 있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박사님을 사랑해요."
"알고 있어, 다 알고 있어.."
"... 그동안, 저를.. 딸처럼, 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 응, 내 소중한 딸..."
리엔은 L을 깊이 끌어안았다. 맑은 하늘에선 빗방울이 떨어져, 둘의 얼굴에 떨어진다. 울지 않는 둘에게서, 연푸른 눈물이 흐른다. 여우비야, 리엔. 그렇게 속삭이듯 말한 L은 옅게 웃어 보였다.
L은 리엔에게 기댔다. 리엔은 L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었어.
우리 리엔은, 비 많이 맞으면 안 될 텐데..
이렇게 있는 게, 더 낭만적이잖아요.
.. 그렇네, 이렇게 있는 게..
.. 있잖아요, 박사님.
응, 리엔..
사랑이라는 건, 정말.. 신이 내린 기적인가 봐요.
... 그렇겠네, 신이 내린..
사랑해요, 박사님. ... 엄마, ..
...
부디, 그곳에선 행복해주세요.
...
L은 꽃처럼 웃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행복한 미소가 완연한, 어느 봄의 바다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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