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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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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편지. 안녕, 잘 지내고 있어?이곳은 지금 눈이 오고 있어.눈이 귀한 곳인데, 신기하지. 오랜만에 내리는 눈인 것 같아.너와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해 봐. 지금 이곳은 겨울의 찬 향기가 가득해.눈이 많이 오는데, 그 사이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와.맑게 웃어 보이던 네 생각이 많이 나더라. 나는 잘 지내고 있어.내 친구도, 가족도 잘 지내고 있어. 우리는 눈물로 보내지 않아.울지 못하는 몸을 가진다는 건 가끔, 아주 슬프기도 하지만...동시에, 다행이다 싶기도 해.네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가네 눈물을 지켜보고 같이 울어줄 수 없어서...그게 유일한 슬픔이었어. 정말이야. 너와 함께 있었던 시간에 행복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오로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던 이 감정이 나를.. 2025. 3. 18.
다정에 익숙해져 속아버린 셀린은 다정함을 몰랐다. 다정함이라고는 없는 삶의 한복판에 놓인 탓이었다. 메마르고 건조한 삶에 한 줌의 안온도 없이, 그저 살아남는 법을 익히는 것이 전부였다. 쉬는 법 따위 익히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의 이름도 몰랐다. 주어진 대로 압살하고 살아남는다. 이 온기 없는 땅에서 살아남기만 하는 것이 괴로웠던가? 애초에 괴로움이라는 단어를 익히지도 않고 그것으로 점철된 것이었는데, 그것을 깨달을 수가 있을까? 이름을 몰라도 알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괴롭고... 하잘것없는지. 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명이 길게 이어지다가, 곧 뒤집어진 시야가 바로잡힌다. 상처 투성이의 손이 뻣뻣하다. 곧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눈앞의 풍경을 바라본다.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책이나 영상에서만 보던.. 2025. 3. 18.
자연의 공허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는 소름 끼치는 침묵이 만연했다. 선명한 붉은 물이 바다처럼 차올라 물결친다. 자연의 한가운데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사람이 죽고, 동물들이 죽어간다.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지만 머지않아 자연의 밑거름이 된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존재만이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머무른다. 비명조차 없는 죽음과 자연의 땅은 울적한 적요만이 존재했다. 이 대지는 그 어떤 것도 긍정하지 않았다. 소리마저 죽어버린 이 땅에선 비명과 자연의 장엄함이 무성하게 피어오른다. 고요는 압살에서 비롯되는 것. 모든 생명이 침묵을 지키자, 비로소 평온함이 밀려온다. 거세게. 모든 것을 부술 것처럼...그리고, 자연에서 비롯된 것. 무서우리만치 강인한 자연 속에서 피어난 존재는 이 대지를 닮은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 침묵하는 .. 2025. 3. 16.
슬픔에 무너지지 말아 클레나는 정 많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 다정함에 메말라가면서도 언제나 손을 먼저 뻗을 줄 알았다. 홀로 남겨진 아이를 유일한 가족으로 삼은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도저히 혼자 둘 수 없어서. 지나쳐 가기에는 너무 다정했던 사람이라서. 혹은, 홀로 남은 모습이 마치 자신과 같았기 때문에. 이름도 없이 혼자인 아이에게 죽은 동생의 이름을 준 것은, 그 작은 것이 자꾸만 애틋해진 탓이었다. 클루디, 내 동생. 그 말을 중얼거리며, 겨우 세 살이 넘었을 아이를 품에 끌어안는다. 너를 지켜줄게. 버려진 너를 내 멋대로 나의 가족으로 삼았으니까... 반드시 지켜줄게.클레나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볕으로 이끌었다.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지만 가끔은 해가 떴다. 햇살이 땅을 비춘다. 메말라가던 사람은 클루디가.. 2025. 3. 14.
도시와 지키는 자. 대검을 바닥에 꽂은 채로 서있다가 곧 빼들어선 검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낸다. 불씨와 바람의 향기가 사라진다. 곧 기지개를 쭉 켜곤 주변을 둘러본다. 적이라고 인식되는 개체는 더 없었다. 뺨에서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코끝에 맴도는 피의 향기에 대충 손등으로 문질러 피를 닦는다. 제법 치열한 전투였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지하의 도시는 서늘하기만 했다. 포션병을 열어 포션을 들이켠다. 누군가의 눈물과 잿가루의 맛이 입안을 맴돌다가 미끌거리며 넘어간다. 옆구리에 제법 깊게 박힌 화살을 빼낸다. 패인 상처에서 살이 차오르며, 곧 작은 흉터 하나만을 남긴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한 것을 생각한다. 분명 피할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했는데, 전날 온종일 전투로만 보낸 것이 화근이었는지... 뻐근한 어.. 2025. 3. 10.
신록의 애정. 꽃의 용족은 하염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생명들을 응시한다. 연약하고 작은 생명, 덧없고 부드러운 생명들을 바라보는 자의 신록을 담아놓은 것만 같은 눈이 선명히 빛난다. 애정이 가득 담긴 눈이 찬란했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덧없게도 빛난다. 나의 작은 사랑들아. 태양조차 빛바랠 정도의 선명하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생명들을 끌어안는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꽃의 용족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들은 스스로 걷기 시작한다. 이윽고 날개를 펼쳐 저 멀리 날아간다. 수명 자체가 다른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일지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꽃의 용족은 작은 생명들을 애틋하게 여겼다.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증오에 가까웠을지도 몰랐다. 인간에 의해 소중한 것.. 2025. 3. 7.
우주의 어딘가, 창백한 푸른 별에서 온 우주 미아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라고는 했지만, 이 기록이 당신에게 닿을지는 모르겠어요.아니, 애초에 누군가에게 닿을지조차 알 수가 없네요. 어쩌면 이 별의 반대편의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지도?그렇다면 성공한 거겠네요! 이 편지가 다 풍화되기 전에 닿은 거니까요. 일단은 이게 살아있는 당신에게 닿았다는 가정 하에 편지를 써볼게요. (당신이 글자를 읽을 수 있고, 통합 초은하단 언어를 사용한다는 가정도 함께 덧붙여서요.) 안녕하세요, 생존자! 나는 멸망한 문명이 있는 별들을 떠도는 방랑자예요. 안타깝게도 일전에 있던 사고로 인해 모든 개인정보를 잊어버려서 알려줄 수 있는 정보가 없네요. (심지어 이름까지도요!) 유일하게 기억이 나는 건... 내 고향이 원래 지구였다는 것 .. 2025. 3. 6.
깊은 적막. 깊은 숲은 언제나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물안개가 낀 적막한 곳은 사람의 발길도, 괴물의 흔적도, 하물며 사람이 아닌 외적인 것의 손길도 잘 닿지 않는다. 그저 고요함, 그것뿐이다. 카모라트는 가만히 숨을 내쉰다. 통증이 머무르는 몸에 축축한 공기가 닿는다. 가끔은 이 고요 속에서 하염없이 사라지거나 짓눌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카모라트는 언제나 이 깊은 곳에서 홀로 지냈다. 이따금 찾아오는 귀중한 손님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낸다. 그것이 지독한 외로움을 불러올지도 몰랐으나 몸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는 깊은 흔적이 통증을 남겨 외로움이 지워진다. 감정을 망각하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한 방식이었지. 카모라트는 물기 어린 숲만큼이나 고요한 눈을 하고는 .. 2025. 3. 5.
기계 영혼. 적막. 찢어질 듯한 그것은 이 무저갱 위의 온갖 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휴머노이드 봇은 무저갱 위를 하염없이 거닐었다. 그저 입력된 대로 걷는 것일 뿐이었으나, 아무것도 없는 -위협으로 가득 차있는- 곳을 거니는 걸음은 지나치게 사람을 닮아 있었다. 휴머노이드 봇이 사람을 닮았다니, 꼭 농담 같은 말이었지. 기계 안구가 깜빡거린다. 마물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센서가 울리고, 샌드웜이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휴머노이드 봇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몇 번의 총성이 울리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것은 장기도 없는 주제에 숨을 내쉬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었다.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다. 센서 등이 붉게 점멸한다. 인간의 신체를 모방한 기계에서 온갖 빛깔의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전투봇이 망가.. 2025. 3. 4.
밤의 계약. 소름 끼치게 고요한 밤은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피웅덩이 사이를 힘없이 걷던 이는 붉게 물들어 끈적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다. 피냄새. 먹은 것도 없어 헛구역질만 몇 번 하다가, 시체처럼 비적비적 걷는다. 다른 사람이 그 꼴을 봤다면 그조차 마물인 줄만 알았을 것이다. 아켈라는 마물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물을 끌어들이는 미끼일 뿐이었지. 마물은 어떻게든 돈이 되었고, 그런 마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성년인 아이들을 미끼로 쓰는 건 이 무법지대에선 그리 경악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피로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던 이는 문득, 눈앞에 호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피로 젖은 손을 가만히 호수에 담가 보았다. 독은 없었다. 물이 충분히 깨끗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망설임 하나 없이 호수에 뛰어든다... 2025.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