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랜 시간 동안 살아왔다. 어쩌면 억겁이라고 불리는 시간 동안. 우주가 생겨나고, 파멸하길 무한히 반복해 나가는 시간 동안. 그는 우주가 1,000,000,000번째 파멸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세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아마 그동안 세어온 수의 40배나 50배쯤.. 어쩌면 그 이상이 되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더 자세히 생각하면 잔상만 남기고 사라진 우주의 숫자를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왔다. 그것이 지루하지 않은가,라고 묻는다면 전혀,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지루하지 않다는 것에는 거짓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너무나도 흔한 비유이지만,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을 앎에도 치열하게 살아내는 그 모든 것은 찰나의 희망과도 같아서. 그는 그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길지 않은 과거에 한 존재를 만났다. 사람이나 사람의 운명을 살지 못하는 존재. 그 존재는 10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살아왔고, 그의 삶에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물론 그가 살아온 시간에 비해 보잘것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나긴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때는, 그래. 10번째 우주가 죽어갈 때였으려나. 그때는 괴로웠던 것 같다. 생명을 원망했고, 또한 고통스러워했다. 하나 그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점차 무뎌진 것이었지, 그런 고통에. 그래도 그는 그 존재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저, 그 존재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줄 뿐이었다.
"이제 죽는구나, ◆◆."
"내 곁을, 지켜주어서 고마워.."
"당연하지, 난 너의 모든 것을 보고 기억하고 있는데. 잠에 들 때까지 네 곁에 있는 게 맞지 않겠니, 아가야. 깊은 잠에 들 때까지, 내가 너의 곁에 있을게."
"... 부탁, 있어."
"무엇이든 들어줄게."
"나의 흔적을... ..."
"알겠어. 없애줄게, 너의 모든 것을. 네가 사랑했던 것, 네가 증오했던 것, 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까지."
"..."
"걱정 말고 잘 자렴, 나의 사랑스러운 피조물아."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 존재의 몸 위에 가볍게 얹었다. 새하얀 불길이 일어나, 그 존재의 모든 것을 사라지게 했다. 온 세상 속에서 그의 존재를 깔끔하게 지워나갔다. 그 모든 것을 하는 그는 울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고요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와 그 존재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은, 그렇게 지워져 갔다.
"울지 않는군, 당연하게도."
"오래도록 살아온 나의 피조물이자 친우가 안식에 들었으니, 당연히 축하해 주어야지."
언제부턴가 그의 옆에 있던 또 다른 신이 말을 걸자, 그는 웃는 듯한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얀 머리끈이 불에 타 사라진다. 이렇게라도 안식에 든다면,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반드시 축복일 테니. 두 명의 신은 빛에 불타 사라진 세상을 바라본다. 잔상처럼 남아있는 빛은 언젠가 검어지고, 이 자리에는 새로운 세상이 탄생할 테다. 그러니, 지금은... 씨앗을 심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 그렇겠지. 그렇다면, 다음 우주로 가도록 할까."
"그게 좋겠다. 가자, 새로운 세상을 보러."
씨앗이 심긴 빛 속에서 새로운 우주가 탄생할 것을 알기에, 흰 빛을 품은 두 신은 그렇게 걸음을 옮겼다.
두 신의 걸음마다 하얀빛이 일렁거렸다.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