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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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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우연이 겹쳐

by @Zena__aneZ 2022. 10. 10.

수많은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 된다고 했다. 그 운명은 피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다.
그가 그녀를 구하는 것 역시.



호흡이 가빠진다. 그녀는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고 있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온몸에 총상의 흔적이 남았고, 뼈가 부러졌다. 몸이 너무나도 약했기에 몸에는 고스란히 관통상이 남았지만 지독한 회복력은 뚫린 피부를 메웠고, 뼈를 이었다. 생명을 끈질기게 붙여놓았다. 온몸이 푸른 피로 물들었다. 이 푸른 피는 바다 종족의 특성과도 같았다. 그녀는 애써 몸을 웅크리고 앉아 숨을 삼킨다. 눈앞이 검게, 푸르게 점멸한다. 다친 것이 빠르게 낫는다고 해서 고통을 못 느끼는 것이 아니다. 호흡이 자꾸만 멈추었다 이어진다. 푸른 피를 울컥 토해낸다. 속이, 쓰리다. 그녀는 제 머리를 벽에 기댔다. 벽에 몸을 기대었다.

"..."

딱딱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대고 차가운 숨을 내쉰다. 고개가 위를 향한다. 바이올렛 빛의 눈이 제 앞에 선 군인에게 향했다. 푸른 머리카락에 검푸른 피가 엉겨 붙어 목과 뺨에 붙어있었다. 그 군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저 힘없는 눈으로 보고만 있을 뿐. 사실 그녀는 군인에게는 큰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미약한 고마움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제 생을 망친 것들, 그녀가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도망간 것을 그들이 정리해주었으니. 결국 저를 죽이려 쫓아오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군인을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한스러운 생의 끝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족의 살라는 목소리가 저주가 되어 생에 붙어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은 생인가. 이제 끝이다. 드디어, 이 한스러운 생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다. 살고 싶었지만, 동시에 삶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코 눈을 감았다. 그는 총구를 그녀에게 겨누었다. 날카로운 고통 한 번이면, 방아쇠를 한 번만 당긴다면. 이 길고도 짧은 술래잡기도 끝난다. 한쪽은 평범한 일상으로, 다른 한쪽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러 떠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왜 방아쇠를 당기고 싶지 않지? 이미 숱한 세월 동안 사람을 죽여왔는데, 이제 와서 알량한 죄책감을 가지는 것인가? 누군가를 겹쳐보는 것인가? 어쩌면 한 번쯤은, 감정에 휩쓸려보고 싶었나? 스스로 던진 질문들이 우스웠지만, 죽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물릴 생각은 없다. 그는 총을 내렸다. 담요 하나를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이질적인 촉감에, 그녀는 눈을 느릿하게 떴다. 의구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는 그 눈빛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 부상이 금방 낫는다고 하지만, 축척된 피로도는 금방 나아지지 않는다. 잠시 잠을 자는 게 좋을 거다."

그는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푸른 피가 담요를 적시고, 그의 손을 뒤덮는다. 따뜻한 푸른 피. 그가 알고 있는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는 느낌이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그 몸이 피로 젖어있으니 기분이 침전되는 느낌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에 한 번 휘둘리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잊지 못할 첫 만남의 추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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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님, 뭐 해요? 잡생각?"

"별 생각 안 한다."

"대령님은 생각 많아질 때마다 표정이 엄청 심각해지는데. 원래도 무표정이라서 다른 군인 분들이 엄청 겁먹는다구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가다 쿡쿡 웃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여러 서류를 집어 들고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그런 그녀를 구태여 막지 않는다. 유독, 그녀에게만 무르게 대한다. 어째서일까.
그녀가 민간인이라서? 하지만 그녀 역시 좋든 싫든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특수부대원 몇 명을 이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제가 데려온 사람이라서? 우습게도 그는 종종 그렇게 사람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유독, 그녀에게만. 그저 감정의 이끌림을 느껴서, 그래서 그런 것뿐인가. 그는 해답 없는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의 손에서 서류를 뺏어 들었다.

"가서 쉬도록 해. 얼마 전에 부상도 입었잖나."

"다 나은지가 언젠데, 그거 과보호예요, 대령님."

"과보호하면 나쁜가?"

"나쁜 건 아닌데.. 아, 또 휘말렸어...!"

"가서 쉬도록 해."

그는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고,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곤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런 작은 행동 역시 막지 않았다. 자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고, 그녀 역시 그러했다. 군인은 싫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에 묘한 거부감이 있다. 그에게만 벽이 무너진다. 왜일까.. 그녀는 질문을 삼켜내었다. 지극히도 평화로운 한 때에 눈을 감았고, 부드러운 침묵을 유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