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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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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by @Zena__aneZ 2023. 3. 27.

그럼에도 지키고자 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그이들이 사랑하는 수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것만 배웠으니 배운 대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나.




이 산에는 오랜 전설이 있다. 머리를 잃은 것이 하염없이 돌아다닌다는 괴담과도 같은 이야기. 어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고 산속을 배회한다고. 그것을 본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것은 인도자라고. 죽음에서 삶까지 이끄는 존재라고. 그러니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아끼는 존재이니.
그것은 어두운 산속을 돌아다닌다. 한 손으로 강물과도 같은 흐드러진 하늘빛의 치맛자락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초롱불을 든 채로 익숙하게 걸음을 옮긴다. 산속에서 낙엽을 밟는 소리와 풀벌레의 소리만이 들린다. 검은 너울 속에 감춰진 가느다란 시선은 사람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가볍게 바닥을 지르밟으며 도착한 곳에는 한 아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있었다. 옆에는 약초 바구니가 놓여있다. 아마 약초를 구하려 깊은 산 내부까지 들어오고 길을 잃은 듯싶었다. 그것은 초롱불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온통 흐리기만 하던 빛무리가 진해졌다. 마치 죽어가던 생명이 살아나듯. 아이는 시야 안에 들어오는 빛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흰색 저고리와 푸른 치맛자락은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들짐승을 만나는 것보다는 사람의 곁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했을 테다.

"아가, 이쪽으로 와."

마치 붕 뜬 것만 같은 음성이 옅게 울린다. 아이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조심히 일으켜 무엇인지 모를 존재의 뒤에 섰다. 그것은 가느다란 시선을 느릿하게 돌려 산속을 걸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고 내리길 몇 번, 아이는 그것을 따라가다 지치면 잠시 멈춰서 숨을 골랐고, 그것은 아이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아이는 너울 너머의 얼굴이 있는지, 혹여나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전설처럼 정말 머리가 없다면 참을 수 없이 무서워질 것 같았기에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을 따라 걸으니 빛 한 점 없는 세상은 옅은 옥빛으로 물들어갔다. 초롱불의 신비로운 빛무리가 조금씩 흐려져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의 발걸음은 서서히 느려졌다. 아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닌 흔적이 남은 길이 보였다. 아이의 얼굴에 맑은 미소가 떠올랐고, 저 멀리에선 아이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가져가, 아가."

그것은 아이에게 약초 주머니 하나를 내어준 채로 어서 가라고 덧붙였다. 너울 너머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약초 주머니를 받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아이는 저 멀리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뒤돌아 발걸음을 뗐다. 정확히는, 떼려고 했다.
어떤 노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무리 어리석은 이라도 급한 기색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뒤를 돌아봤다. 노인의 뒤에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보자마자 이쪽으로 황급히 뛰어온 듯이.

"감사합니다, 제 손주를 구해주셔서."

"당연히 해야 했을—"

"그리고, 옛적에 제 어머니를 구해주셔서.."

"..."

"늘 전하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은인."

노인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만난 은인에게 전할 수 있는 감사였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마움이었다. 아이는 노인 뒤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너울 안으로 투명한 햇살이 매끄럽게 흘러들어온다.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그때를 떠올린다면,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도 곱게 미소 짓던 것만 같은 그 사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작게 다짐했다.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나면, 제 할머님이 그랬던 것처럼 인사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