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몸을 일으킨다. 대충 건물 안으로 들어와 아무렇게나 몸을 눕히고 잠들었다 일어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초반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다니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혼자 다녔다.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것이 안전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이제와서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좀비가 창궐한 이 시점에서 더 오래,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은 쓸모없기도 했다. 릴리는 잘 벼려진 도끼를 허리춤에 멘 채로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긴다. 평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적막하기만 하다. 좀비 사태가 터진 지금,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릴리는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차피 가족도 없었다. 소중한 친구도, 연인도 없었다. 릴리는 모든 것에서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 탓일까, 이런 적막이 오히려 반가웠다. 이제는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에 외투를 잘 여미곤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비가 올까? 아침이 됐을 텐데 하늘은 아직 어둑하기만 했다.
릴리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음식이 가방 속에 있었다. 상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빨리 넣어 두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무언가 크게 부딧히는 소리와 함께 큰 폭발 소리를 들었다. 빠른 발걸음이 멈춘다. 폭발 소리가 난 곳에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세요, 그 비명 섞인 목소리에 무언가에 홀린 듯 빠르게 뛰어간다. 소리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살릴 수만 있다면...
"살려, 살려줘..."
아, 이런. 릴리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동차의 앞부분은 완전히 찌그러졌고, 릴리보다 더 빨랐던 좀비가 차의 창문에 우악스럽게 달라붙어 운전자의 피부를 물어뜯고, 좌수석에 앉은 사람은 죽어가며 소리만 흘렸다. 뒷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요, 그 아이만이라도. 릴리는 도망치고 싶었다. 어쨌든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무시하고 도망치는 게 옳은 선택일까? 지금 생존자가 나밖에 없는 걸까? 생각을 더 할 시간이 없었다. 도끼를 들고 창문을 요령좋게 깨부순 뒤 문을 열었다. 잔뜩 겁에 질린 남자아이를 품에 안고 도닥이던 조금 더 큰 아이가 보였다. 마음 한편이 시큰거렸지만 그 감각을 무시하곤 둘을 내리게 한 뒤, 바로 뛰어가 근처의 집으로 들어갔다.
"... 괜찮아?"
몸을 숙이고 앉아 두 아이를 살펴본다. 작은 아이 쪽은 괜찮았지만 큰 아이의 상처가 심했다. 일단 치료부터 하자, 그리 말하곤 소파에 아이들을 앉혀 나름 익숙한 손길로 치료했다. 아이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것에 또 못내 마음이 쓰여 가지고 있던 담요를 두 아이에게 잘 둘러준 뒤 음식을 조금 꺼내 탁상 위에 올려둔다.
"...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언니가 아니었으면 큰일났을 거예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일단 조금 쉬고 있어. 충분히 쉬고 난 다음에 음식도 먹고."
동생 지키느라 수고했어. 동생도, 누나 따라서 잘 있었고. 아이들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곤 손을 거둔다. 이제 겨우 열일곱 남짓해보이는 아이였는데 더 어린 동생을 지킨다고... 릴리는 그런 가족애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지킬 사람이 있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게 되니까.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리다 릴리의 품에 그대로 안겼다. 둘을 품에서 도닥이던 릴리는 천천히 등을 두드렸다.
어느정도 진정이 됐는지 아이들은 릴리가 준비한 음식과 물을 조금씩 먹었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둘은 조금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왔고, 거기에도 이곳과 비슷한 사태가 터졌다. 공장이 폭발해 마을 전체가 불타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것을 피해 도망치다가... 바깥에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이 사그러들겠지. 릴리는 창밖을 한번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보았다. 자기소개도 못했네. 나는 릴리야. 너희는? 아이들은 잠시 어물거리다가 말을 잇는다. 큰 아이는 엘린, 작은 아이는 넬이었다. 긴장이 조금 풀린 것 같은 둘을 바라보던 릴리는 옅은 웃음을 보였다.
"둘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를 따라와도 돼. 난 비교적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거든. 릴리는 둘을 데려갈 의향이 있었다. 적당한 거처도 있었고, 둘을 챙길 여력도 있었다. 아예 못 싸우는 것도 아니었고... 아는 의사도 있었으니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찾아가서 둘의 치료를 맡기면 되었다.
"저... 저희는 저희끼리만 다녀도 괜찮아요."
"무섭지 않겠어?"
이 정도로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그 말에 릴리는 잠시 고민하다, 제 목에 둘러진 붉은 스카프를 빼서 넬의 목에 감아준 뒤 가지고 있던 야구배트를 엘린의 손에 쥐여주었다. 깨끗한 종이에 펜으로 자신의 거처를 적어 쥐여준 뒤에 깨끗한 옷도 두 벌 꺼내 올려둔다. 도움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와. 음식은 더 두고 갈게. 두 아이는 릴리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릴리는 모자 하나를 눌러쓴 뒤에 집 밖으로 나선다. 비가 오는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같이 가자고 한 말을 거절한 이유가 있겠지. 릴리가 다른 사회에 속해있는 것을 못 견뎌한 것처럼. 오늘따라 빗방울이 사납다.
릴리는 그날 이후로 그 남매를 보지 못했다. 그저 어디에선가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었다.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디에선가 잘 지내고 있다고, 그렇게 믿으면서.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릴리는 제 겉옷을 단단히 여미곤 어느 폐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물자를 찾으러 온 길이었다. 이런 곳에 무엇이 있겠냐만은 혹시나 해서. 손도끼를 손에 움켜쥐고 달려드는 좀비 하나를 내리쳤다. 속이 울렁거린다. 동전 두개를 꺼내 좀비의 손 위에 조심히 올려놓고 걸음을 옮긴다. 누군가가 보면 참 의미없는 짓이라 생각하겠으나 릴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도 사람이었으니까. 릴리는 좀비를 죽일수록 부채감을 크게 느꼈다. 어쩌면 릴리에게 소중한 사람이 없어 그랬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소중한 사람이 없으니 혼자였고, 혼자였으니 사람을 몇이나 죽였을지 모를 좀비를 동정한다. 우습게도.
주변을 둘러본다. 폐건물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무언가가 보였다. 익숙한 옷, 익숙한 아이의 모습. 목에 잘 둘러진 붉은 스카프. 이제는 좀비가 된 아이의 모습. 릴리는 소중한 사람이 없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 소중하게 여길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동정했다. 우습게도...
릴리는 손에 든 도끼를 내려놓는다. 좀비가 달려든다. 릴리의 손을, 팔을 물어뜯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두르고 있던 겉옷을 벗어 아이에게 둘러주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폐건물을 빠져나간다. 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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