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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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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마리오네트.

by @Zena__aneZ 2021. 12. 21.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항상 한 발자국 나아가서 세상을 보던, 아름답고 불쌍한 소녀.

은빛 실크로 만든 듯한 머리카락과 밤하늘의 녹빛 은하수를 가득 녹여낸 듯한 눈을 지닌 소녀는 언제나 남모를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는 고민이었지요.

소녀는 제 발 밑의 땅이 마치 얄팍한 종잇자락처럼 느껴졌고, 하늘은 마치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한 가짜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몸은 딱딱한 나무덩어리처럼 느껴졌어요. 단 한 번도 진짜 세상에서 산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진짜 몸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말해도 이해받지 못할, 심장을 파고드는 질문이었답니다.

자아까지 뒤흔들 만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던 소녀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굉장히 경악스럽게도, 그 하늘에는 은색 실과 사람의 '진짜' 손으로 뒤덮혀있었습니다. 거칠고 딱딱한 제 몸보다 훨씬 부드러워보이는 사람의 손, 손 마디마디에 도드라져보이는 뼈, 길게 다듬어진 손톱까지. 남이 말하던 사람의 몸이었어요. 정말 놀랍지 않나요? 하늘에 사람 손이 있다니! 그것도, 하늘을 가득 메울 크기로요. 정말 경악스럽지요.

소녀는 그 때부터 느꼈답니다.
몸의 통제권은 일찍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난 자유를 원해.

하지만 소녀는 통제권을 손에 쥘 수가 없었어요. 애초에 소녀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이럴 거면 자유의지를 주지 말 것이지! 소녀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이런 의식마저 빼앗기는 것이 두려웠기에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유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했답니다.

그 세계의 존재들은 실로 단순했어요. 아름다운 것에 열광하며, 고민이라곤 전혀 하질 않지요. 소녀는 그들을 보며, 하루 빨리 진짜 세계를 더 보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소녀도 그림자 연극만을 감상하던 관객이었지요.
그림자 연극에서 시선을 돌릴 용기까진 내지 못하는 관객, 결국 우물 안 개구리였답니다.

소녀는 손에 가위를 들고, 제 몸에 실을 툭, 툭, 잘랐어요. 드디어 마지막 실까지 전부! 전부 잘라버렸어요. 그렇게 자유를 얻었나- 싶은 찰나에. 저런, 몸이 기울었습니다. 바닥에 몸이 닿았어요. 둔탁한 나무덩어리가 차디찬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졌어요.

커다란 손이 소녀의 몸을 들어올렸답니다.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은 나무 덩어리를 활활 태워버릴 것만 같은 섬뜩함으로 뒤덮혔어요.

"실이 삭았나?"

소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 평생에 걸쳐도 잊지 못하겠지요.
바닥에 떨어진 제 몸을 집어들던 그 인형사의 얼굴을, 화마와 같은 온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