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선생님은 참 가련한 사람이다. 모든 기억을 잃고도 지킨다는 의무를 저버리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다른 시간선으로 넘어갔지만, 그곳에서 만난 가련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본래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유 없는 친절함을 베푸는 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강했지만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외로워도 외로운 줄 모르는 사람. 세상에게 버려졌으나 끝내 세상을 버리지 못한 사람.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독하게도 사람이었던 존재. 그 가녀림을 사랑하지 않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약한 존재였다. 숨 한 번에 바스러질 내 생명을 질긴 줄로 만들어준 그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무한의 기억을 잃어버리며 무한을 사는 사람.
"선생님, 선생님은 머지않아 저를 잊어버리겠죠?"
"... 맞아. 며칠 안으로 너를 잊어버릴 거야. 그때가 왔어."
밤하늘빛 중단발쯤 되는 머리카락은 건조한 바람에 너울거렸고, 보석 같은 붉은 눈은 탁한 태양 아래서 빛난다. 그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어느 시선으로 봐도 그랬다. 어느 순간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릴 때면 차갑게 식은 손을 뻗어 머리칼을 넘겨준다. 다정한 손길이다. 너무나도 다정해서 잊어버리고 싶지 않을 수는 없냐고 하고 싶었지만, 무언가를 잊어버리기 싫은 것은 그 사람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것이다. 저는 선생님의 다정함을 알아요. 목소리를 들은 그 사람은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로 머리칼을 다시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그동안 실컷 배운 마법이나 지식은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이 황량한 세상의 유일한 생존자인 당신을 놓고 가는 게 마음이 쓰였으나, 스승 되는 자는 그저 담담하게 서있을 뿐이었다는 것이 또 슬펐다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알려준 지식이야."
"혼자서도 견딜 수 있게요?"
"그래. 모든 사람은 혼자 남을 때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흐릿하기만 한 햇살이 따갑다. 시야가 일렁인다. 이름마저 망각해 버린 가녀린 사람.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연기 같은 숨을 한 번 내뱉고는 손에 붉고 하얀 부채를 쥐여준다. 바람과 화염에 특화된 마법을 구사하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줄 수 없었는데. 이내 가장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그에게 건네준다. 큼지막한 붉은 돌이 걸려있는 목걸이. 이제는 사라진 가족이 준 것. 평생을 부적처럼 아끼던 것이었지만 나보다는 선생님에게 더 필요할 것임이 분명했다. 선생님이 가지고 있어 주세요. 제 이별선물이에요. 그 목걸이를 받아 든 그는 그제야 웃었다. 제자의 행동을 귀엽게 여기는 듯하면서도 이별선물이 영 생소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아녜요, 더 좋은 걸 못 드려서 죄송한걸요."
네 보물의 가치를 훼손하고 싶지는 않아. 선생님은 익숙하게 목걸이를 걸었다. 저보다도 더 선생님에게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선물도 다 나눴으니 이제 정말 이별이 눈앞이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저 안 가면 안 돼요?"
선생님의 품은 차갑기만 했다. 마치 이 황량한 세계처럼. 그 차디찬 운명처럼. 찬 손으로 등을 두어 번 토닥이고는 몇 발자국 떨어진다. 어서 가. 어째서 선생님의 웃음은 결핍처럼 다가올까? 그 이유는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차원의 틈새로 넘어간다면, 숲의 향기가 가득 느껴진다. 문이 닫힌다. 당신은 저 차가운 문 너머로 영영 사라진다. 부채에서는 여전히 당신의 겨울향기가 느껴진다. 차갑지만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걸음을 옮긴다. 선생님이 없는 첫 발걸음이다.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이학 접기. (0) | 2024.03.12 |
---|---|
혼자 남은 세상에서. (0) | 2024.03.10 |
드디어 마주한. (0) | 2024.03.06 |
은빛의 수호자. (0) | 2024.03.04 |
땅거미 질 무렵에. (0) | 2024.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