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작은 노트를 펼쳐 모든 것을 기록해 놓았다. 제 작은 제자가 선물해 준 목걸이와, 제자를 배웅해 준 것, 자신이 내뱉은 이별의 말들, 그때 느꼈던 기분. 완벽한 기록으로 남겨놓고 나서 책장 한편에 책을 꽂았다.
문득 이 세상이 보고 싶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항상 이랬던 것 같다. 그는 영원히 멈춰있을 것만 같은 걸음을 옮겼다. 황량한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늘 봐오던 풍경이었다. 오로지 잿빛의 세상을 눈에 담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릴 것이고, 또 지겨울 만큼 눈에 담을 곳을 필사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그 자신도 몰랐다. 아마도 영원히 모를 듯싶었다. 시야에 아지랑이가 서서히 피어오른다. 그것을 느끼고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황폐화된 도시를 감싸고 있던 투명한 돔을 건드리니 파동이 퍼져 나가듯 흐릿하게 빛났다. 창백한 도시를 견고하게 지키고 있던 것. 바닥에는 또 노란색의 꽃이 보였다. 이 꽃도 곧 사라지겠구나.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꽃을 한참 시선 안에 담고 있다가 시야가 포말처럼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이 항상 끝나는 곳은 하얀 성당이었다. 기록 한 줄로도 남겨놓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 무엇도 남아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그는 이곳을 절대 떠날 수 없었다. 습관은 기억보다도 무거웠다. 그는 성당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무것도 없는 홀의 한가운데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이질적인 것. 그는 그가 기억하는 한해서는 피아노를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것 위로 손이 거닌다. 이 음악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다만 육신이 기억하는 것을 연주할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연주하다가 일순간 끊긴다. 시야가 어지러워진다. 이번 기억이 사라진다면 이곳에 대한 육신의 기억마저 사라질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피아노 앞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걸어간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집 안으로 들어선다. 곧 낯설어질 공간. 그는 소파에 몸을 뉘인다. 하얀 조명이 깜빡거리다 사그라든다. 시야가 어지럽다. 기억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하던 것들이 점차 낯선 것으로 변해간다.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지났으나 이 낯설고 차가운 것 같은 감각에 익숙해질 일은 앞으로도 평생 없을 것 같았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 전 차를 나눠마신 이들은 잊힌 지 오래였다. 점차 사라진다. 저기 멀리에 존재하던 사람들, 그리고 지척에 있던 사람들, 제법 소중하게 여겼던 이들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없어진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호흡이 영 버겁다. 분명 소중하던 것이 있었건만 이제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는 눈을 감는다. 그는 그의 이름마저 잊었고, 이윽고 눈을 뜬다면 또 감정 하나 남아있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잊어버린 줄 알았던 것은 습관-육신의 기억-으로 남아서 온전한 망각은 아니니 이것은 또 누군가의 안배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