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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은빛의 수호자.

by @Zena__aneZ 2024. 3. 4.

그는 눈을 떴다. 투명하게 빛나는 눈 위에 그려지는 풍경은 항상 똑같았다. 자신의 일족, 은여우를 구하기 위해 검을 들었고, 필멸자의 한계를 벗어난 그는 스스로를 제단 아래에 놓인 석상으로 만들었다. 석상의 봉인을 풀 주문을 일족에게만 알려준 채로. 일족이 위험해진다면 봉인을 풀도록. 그리고 봉인을 풀 여유도 없을 정도로 급박해지는 상황이라면, 일족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어버린다면 영원히 석상으로 남아 부서지도록. 그가 눈을 뜬다는 것은 결코 좋은 뜻이 아니었다. 봉인이 풀리자마자 잘 손질된 은빛의 검을 허리춤에 차고 제단 아래로 내려가 문을 나선다. 흐릿한 꽃내음과 수많은 장식들이 보인다. 그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최소한, 큰 혼란은 없어 보였다. 어떤 문제가 있길래 그가 깨어난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눈을 뜬 것은 천 년에 걸친 시간 중 총 네 번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전쟁이었고, 세 번째는 역병이었다. 네 번째는 신과 맞먹는 자들과의 전투를 치뤘다. 일족의 수호자였던 그는 지난 날을 잠시 되돌아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문 밖의 풍경은 생기가 넘쳤다. 드문드문 자라나있는 들판의 꽃들과... 그는 지금이 가장 평화로운 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에는 아이들이 많이 숨어 있었다.

 

"겁먹지 말고 나와. 해치지 않으니."

 

적당히 무겁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퍼진다. 그보다 한참 어린 아이들이 쭈뼛쭈뼛 나온다. 대부분 비슷해보이는 나잇대의 아이들인 것 같아 잠시 의아하게 바라본다. 아이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고 머뭇거림도 느껴졌다. 그는 곧바로 아이들이 자신을 깨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희들의 바람이 나를 깨웠구나. 나를 왜 깨웠니?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퍼진다. 아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한 아이가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저희는, 저희의 수호자인 분께 평화의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 말이 바람처럼 닿았다. 그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다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서 다른 어른들의 시선을 피해 이 성역까지 들어왔구나. 아이들은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방금 깨어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잠든 것은 백 년도 더 된 일이었다. 방금 깨어난 것일 텐데, 이곳의 구조를 전부 꿰뚫은 것은 물론 아이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모든 감각이 뛰어났고 마나를 다루는 능력도 특출났다. 그래서 바깥에서 아이들을 찾는 이들의 마나도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

 

"너희들만 보낼 수는 없으니... 같이 가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 옅은 푸름 머금은 새하얀 머리칼이 흔들렸다. 다정하고도 강인한 표정은 알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아이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녹음 가득한 성역에서 벗어나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몇몇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고 다그치다가도 그를 보고는 완전히 굳기도 했고, 또한 다른 마법사들을 부르려 급하게 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그는 누군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떤 이름을 말했다. 그 사람은 깜짝 놀라선 조부님의 이름을 어찌 아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가만히 웃음지었다. 오랜 친우였다고. 영원을 산다는 것은 영원토록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외로운 일이었으나 잠시나마 추억을 되새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또한 충분했다. 그는 맑고 투명한 눈으로 도시를 바라본다. 활기가 넘치는 거리,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물줄기, 잘 다듬어진 도시의 골목에서는 꽃내음이 풍겼다. 그동안 봐온 세상이 아니라, 정말 평화로운 세상이다. 수호자님은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은 처음 마주하시는 것이지요. 그가 네 번재로 깨어나고 잠에 들 때, 그가 외롭지 않도록 평생을 살아가기로 다짐한 오랜 마법사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구태여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세상을 내려다본다.

 

"아이들이 참 예뻐. 잘 커가는 모습도, 마음도. 안 예쁜 곳이 없어."

 

"언젠가 그 아이들은 다 크겠지요. 그래도 여전히 당신의 아이들일 겁니다."

 

그는 제 일족을 지키고자 스스로 봉인하고 잠드는 것에 일말의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다만 이렇게 깨어난 것은 처음이었기에 유난히 빛나 보였다. 조금 더 지켜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무려 천 년만에 맞이한 평화의 시대입니다. 다른 아이들도 그것을 원할 것이고요. 그는 야트막한 소리를 흘리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야겠네. 그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말도 들려줄 겸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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