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이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무언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의미 없는 덩어리가 되었다. 싫어하던 사람, 좋아하던 사람, 사랑하던 사람 모두. 마물의 먹이가 되었거나, 주술의 일부가 되었거나... 어쨌든, 블랭크는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눈처럼 흰 머리칼을 빛바랜 분홍 리본끈으로 느슨하게 묶어 내리고,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고 있노라면 찬 공기에 폐부가 찌그러지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 이건... 통증. 코끝에 스치는 피의 향기에 눈을 감았다 뜨면, 피보다 붉은 눈이 설원 위에서 무섭게도 반짝거렸다. 발치에 미지근한 숨이 닿았다. 아직 살아있는 것, 하지만 곧 죽을 것은 숨을 힘겹게 헐떡거리며 블랭크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마치 표백한 것만 같은 표정이 흩날리는 눈 사이에서 반짝였다.
"아, 그래, 맞아... 물어봤었지. 당신이 물어봤었잖아. 왜 이러냐고. 무엇 때문에 이러느냐고..."
블랭크는 빙하보다 시린 붉은 눈으로 상대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손에선 그의 피가 아닌, 타인의 피가 타고 흘렀다. 구슬처럼 굴러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비릿한 감각을 표정 대신 띄운다. 대답할 가치도 없게...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독한 고요가 찾아온다. 블랭크는 피부가 우그러지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낀다. 이게 다 추워서 그런 거야. 추워서...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전부 잃고 나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의 안에 있던 작고 단단한 것, 이를테면 자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 산산조각 났다.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내 것을 다 깨부순 것들, 소중한 것이 전부 깨져버린 사람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 깨져버린 것을 그러안고 울었던가. 울기도 했던가. 무엇 때문에 비탄도 못하고 표백해 버린 마음을 그러안았던가... 붉은색은 타오르는 불꽃의 색도, 희미한 희망의 색도 아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피의 빛깔. 이 엄동설한에 창백하게 메말라가는 붉은 장미가 갈치에서 일렁거렸다. 장밋빛 인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입에서 희멀건 연기, 입김이 흘러나와 흩어진다. 이게 따뜻해서 그런 거야. 그래서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흘리지 못해... 블랭크는 우두커니 서있다가 발밑에 닿는 웅덩이를 본다. 웅덩이 아래 자욱하게 깔린 눈밭을 본다. 이저는 더럽혀진 흰 눈 아래에 무엇이 묻혀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 눈을 덮은 것보다도 더욱 짙었다. 피가 퍼지고, 조각난 수정처럼 빛나며 존재를 알리는 슬픔이 있었다. 그것을 잘근잘근 짓밟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떳떳하게도 살아가더라. 그 모습이 역겨웠던가. 블랭크는 제 이름처럼 텅 비어버려서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없애갔다. 죄 없는 사람을 짓밟은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차게 식은 핏빛의 눈 안에는 다 타고 남은 재와 같은 매캐한 것이 느껴진다. 그것을 슬픔이라고 불렀던가. 이 모든 슬픔의 종착점을 표백이라고 불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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