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다정은 바람과 같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고목을 부러트린다. 불길을 키운다. 쓸려 나간다, 모든 것이. 의미도 없이. 뿌리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이고 전부 흩어진다. 유약한 사람은 다정함에 숨이 막혔다. 그것은 너무 강인해서 그것에 자꾸 휩쓸려 사라지는 것이다.
"..."
눈앞에 안개가 낀 듯 뿌옇다. 이상하다, 이렇게 흐릴 리가 없는데. 펜비는 결국 차가운 감각에 휩싸인다. 이토록 시린 여름이라니. 찬 바닷물이 무릎의 언저리에서 일렁거렸다. 목소리가 들린다. 걱정하는 소리, 비명과 같은 외침... 잠시 감고 있던 새파란 눈이 느리게 뜨였다. 다정한 걱정이 손끝에 닿는다. 다정, 다정함이여. 너는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굳센가. 이토록 강인한가. 어째서 이토록 봄볕처럼 따뜻하면서도 서리 내리는 아침처럼 서늘한가... 펜비는 기어이 무너지는 몸을 지탱하며 일으킨다. 언젠가 한 말이 있다. 걸어가는 것은 찬란한 것, 지나가는 것은 색이 빠져가는 것, 지난 것은 빛바랜 것... 그렇다면 다정함이여, 바람을 닮은 나의 진정한 가족이여. 너는 지금 어디에 서있어?
찬란한 것을 지나 색이 빠져가고 결국 빛바랜 것이 되어가는 것이 삶이라면, 바람을 닮은 당신들은 어디쯤에 서 있을까? 세차게 불어 이곳에서 저만치 가버리는데, 어떻게 사람이 바람과도 같을까? 내 영혼이 당신들에게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열감이 느껴진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상처를 차갑게 식힌다. 식혀주고 또 떠나는 것을 보니 꼭 알겠더라. 그들의 영혼을 구성하는 것은 반드시 바람일 수밖에 없겠노라고. 당신들은 바람이다. 그러니 당신들을 그리워하는 나도 바람이어야만 했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버리는, 오롯이 상실을 닮은, 하지만 그것에는 상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인함도 있다. 이윽고 몸이 가벼워진다. 멀어져 가던 감각이 점차 또렷해지고 손에 들고 있던 쌍날검이 짙푸른 색으로 빛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이것은 슬픈 청빛이 아니라 자유롭고 가벼운 바람을 닮은 청빛이다. 부러트리는 것은 실려 날아가는 것, 불타고 남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 쓸려나간 것을 다른 곳까지 데려다주는 것. 뿌리가 없는 것은 그대로 머물러도 괜찮았다. 그러니 상실이여. 한때 나를 헤집어놓았던 것이여. 이 모든 것에 그저 괜찮다는 말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틀림 하나 없는 진실이었다. 이 세찬 바람이, 이곳에서 저곳까지 데려다주었기 때문에...
폭풍 몰아치던 하늘이 맑게 갠다. 파도에서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바람이 가깝다. 피가 흐른다. 푸름이 이윽고 붉게 물들었다. 파란 눈이 탁해진다. 한없이 가벼웠던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고대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바다에 간 사람들은 다시는 못 돌아왔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펜비는 운이 좋은 편인 것일까? 이제는 흐려진 청회색 눈이 햇빛과 바람에 반짝였다. 바람, 바람이다. 떠난 자의 향기가 사라진다.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온기. 바닷물에 적셔진 얼음장 같은 몸이 온기에 휩싸인다. 바람이 불어와 상처의 열기를 식혀 주었던 것처럼 온기를 전한다. 잿빛이기도 하고 깊은 바닷빛 같기도 한 눈이 일렁거린다.
"대표님, 아빠라고 불러봐도 괜찮을까요?"
두어 번 입을 어물거리다가 문장 하나를 내뱉어본다. 온기가 짙어진다. 아빠. 그 단어가 뭐라고 이토록 사무치는지... 펜비는 눈을 감은 채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또 바람이 불어온다. 이 적막함이 세찬 바람소리에 흩어진다. 파도가 희게 부서지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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