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지 않는 날이다. 평범한 세상에 지내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지극히 평범하지만, 그에게만은 달랐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평화요, 안식이었다. 한 달에 하루나 이틀, 길어봤자 사흘이나 나흘 정도 비가 그치는 세상은 언어 그대로 늘 잿빛이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비로부터, 그리고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투박한 옷을 입고, 날붙이를 들고, 방독면을 쓰고. 언제 목숨이 다할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 필사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찾고 희망을 찾았다. 방독면을 쓰는 것은, 결코 웃지 못하는 삶을 살며 웃기 위해서일 것이다.
"... 미련한 놈들."
그렇게 중얼거린, 높낮이가 존재하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기계음 따위가 섞여 든다. 그는 방독면의 전면에 아무것도 띄우지 않고, 술잔 세 개를 바닥에 내려둔다. 이제 막 비가 그쳐서 축축하게 젖은 땅에 나무로 만든 컵이 올려진다.
"너네 때문에 아껴둔 거야, 이 녀석들아."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린다. 그는 노란 우비를 벗고, 방독면과 검은 장갑을 함께 벗어둔다. 습한 흙냄새가 들이켜진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길게 늘어진 흉터 하나가 있다. 돌연변이 괴물에 의한 깊은 흉터였다. 저와 다른 동료 하나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그 외의 모든 동료들의 생명을 앗아간...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흉터는 상처로 변한 듯 욱신거린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은 채로, 술병 하나를 들고 따서는 나무 컵 안에 술을 가득 따른다. 알코올의 향이 풍긴다. 지나칠 정도로 세속적인 향기랄까. 그것에 설핏 웃음을 흘린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곧잘 술을 먹곤 했지만, 이제는 거의 먹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만큼 맛있지가 않아서였다.
그는 여전히 기억한다. 죽어가던 이들이 제게 속삭인 말을. 내 몫까지 살아가 줘, 복수해줘, 그런 진부한 말들은 하나도 하지 않던 그들을. '웃어, 안테라. 웃으며 살아. 그것이 인생의 참맛이지.' 평소에 농담 삼아 자주 하던 말이 유언이 된다니. 너네는 진짜 나쁜 놈들이야. 죽어서도, 다 악령들이라고.
"악령이라도 좋으니, 다시금 함께 술잔을 기울이자."
그리 중얼거리던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병을 부딪힌다. 습기 머금은 바람이 그의 청록빛 머리칼을 흐트러트리고, 냉기 머금은 녹빛의 눈은 감겼다 뜨인다. 흉터로 뒤덮인 손이 술병을 기울인다. 입 안에 황금빛의 술이 밀려들어온다. 알싸하고 매운, 식도가 타는 듯한 강렬한 맛이... 그들의 말마따나 웃으며 사는 것이 인생의 참맛이지만, 한 번쯤은 이름 붙이지 못할 감정에 수몰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는 남몰래 찾아온 악령들의 곁에서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였다.
악령이 찾아온 날은, 아름다운 별이 뜬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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