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누구나 오늘은 처음이잖아. 오늘의 아픔을 성장통으로 삼고. 오늘도 힘내.
스스로 내뱉은 말들이 생기를 얻는다. 생기를 얻은 것은 쉴 새 없이 심장을 찔러댄다. 어떻게 이렇게나 무지하며 안온한 말일까. 이 말을 듣는 모두가 만족하지만- 정작 스스로만큼은 만족하지 못한다. 성장통이라기에는 너무 확실한 고통이었던 까닭이며, 모두가 잔인한 사람인 까닭이다. 그들 역시 나처럼 고통받거나, 나처럼 불행하거나, 나처럼 짙은 고민을 하는... 하지만 그 속에서 나만이 소중하니 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하지만 사람이란 것은 원래 그리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분홍색 밤바다 같은 눈이 햇빛에 일렁인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손으로 눈을 가려버리고 만다. 17살 때의 어느 햇살 좋은 날이었다.
".. 어서 와, 옥슨.. 음. 델피니아. 오늘도 간단한 얘기를 나눌까?"
별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무엇을 좋아한다던가, 무엇을 싫어한다던가. 혹은 어떤 것을 더욱 선호한다던가.. 평소엔 잘하지도 않던 제 이야기까지 꺼내가면서 듣는 네 이야기는 생기가 넘쳤다. 일찍 빛바랜 삶의 자그마한 이변이 퍽 즐거웠다. 이 즐거움은 낭만으로 시작해서 씁쓸한 뒷맛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덧없는 즐거움이라 해도 끝나고 남는 것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이제야 조금 솔직해져 본다면, 나 역시 오래도록 너를 좋아했다. 그래, 사랑은 아니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설령 사랑한대도 고백할 생각 없었고, 나라면 너를 절대 사랑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만큼 달랐으니까.
"그러니까, 다 괜찮다는 거야."
너무나도 달랐는데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있었던 것은 너와 내가 닮았기 때문이다. 일찍 어른이 될 수밖에 없던, 고작 10대 후반인 우리들은 많이 닮아있었다.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할 만큼.
"나, 조금 지친 것 같아."
21살이 됐을 때 꺼낸 얘기였다. 사실은 많이 지쳤었다. 괜찮아야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같이 있되 홀로 동떨어진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으니까. 그래서 너와 있는 것이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내 손을 차마 잡아주지 못한 네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넌 알까, 델피니아. 그때의 넌 미안하다는 듯한, 괴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 우습게도, 그게 참 고맙더라. 우리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겠지.
"그때 내게 해 준 네 이야기를 잊지 못해."
너라면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동시에 너의 강인함에 부러워하기만 했지."
... 아, 말이 계속 들려온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대답해야 하는데, 무언가 뜨거운 응어리가 속에서 느껴진다. 이게 너와 함께 겪은 성장통일까.
"와줘서 고마워."
난 강한 사람이 아니었어, 델피니아. 정말, 하나도 강하지 않았어. 나를 강하게 해준 것은 오히려—
"받아줘서 고마워, 델피니아."
함께 겪은 성장통이 눈부시도록 아프다. 미성숙한 나는 드디어, 제대로 앞을 보았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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