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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눈, 그리고 선물.

by @Zena__aneZ 2022. 12. 22.

오늘은 유독 내리는 눈이 거세다. 곧 눈보라가 될지도 몰랐다. 찬 눈이 뺨을 두드린다. 발갛게 변한 손끝으로 뺨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치우며, 스스로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표정을 애써 피며 주변을 둘러본다. 마물이 득실거리는 설산의 한가운데 홀로. 누가 본다면 미쳤다고 할 테지만, 지역의 특수성을 생각해본다면 홀로 있는 것이 더 안전했다.
등에 매고 있던 대를 꺼내들며 자세히 살폈다. 개체수가.. 의뢰서에 적힌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원래 생각하던 수의 두 배... 어쩌면 세 배. 이럴 때 경우는 두 가지다. 처음부터 사기 의뢰였거나, 그 사이에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거나. 가능성은.. 후자에 가까울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마물의 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으니. 큰 부상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눈이 끊임없이 내린다면 설산에 고립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다른 이들과 엮이기 싫어 홀로 임무를 나온 게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지금 후회해도 늦었겠지. 때늦은 후회를 저편으로 미뤄두고 보라색 머플러를 여민다. 골전도 이어폰과 유사하게 생긴 기기를 가볍게 조작하길 몇 번, 눈앞에 뜨는 홀로그램을 바라보다 무기를 고쳐 잡는다. 기다란 대에 강렬한 푸른빛이 감돌며 삼지창의 형태가 잡힌다.

그에게 설산을 거닐며 전투를 벌이는 행위는 일반인이 익숙한 길을 산책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처음 마주한 공간이라 해도 괜찮았다. 눈 가득한 곳은 언제나 그의 주무대였으니. 흰 눈꽃이 삼지창의 궤도에 어지러이 흐드러진다. 푸른 오러가 휘감긴 발자국마다 남는 것은 고요한 도살이었다. 머리카락을 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마물의 팔을 눈부신 푸른 오러로 끊어내며 도륙해나갔다. 빛 삼켜낸 푸른 눈은 언제나 차분하게 마물들의 끝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발자국이 멈추었을 때, 주변은 검고 붉은 피로 가득했다.

"... 돌아갈까."

어느덧 눈발이 약해졌다. 하늘을 잠자코 바라보다 작게 한마디 내뱉고는 삼지창의 형태를 없앤다. 다시 평범한 대로 바뀐 것을 등에 매고, 토벌의 증표인 마물의 핵을 챙긴다. 그러다 손등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에 눈 깜빡..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뺨의 상처에서 피를 닦아냈다.

"음.. 혼나려나..."

작게 중얼거린 말에 얕은 웃음이 흘러버렸다. 뺨에 꼼꼼히 밴드를 붙이곤, 걸음을 옮겼다. 어서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한결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 산을 내려간다. 선물이라도 사 가야겠다. 오빠들한테는 목걸이.. 언니한테는 귀걸이를 선물할까. 한없이 가벼운 생각들을 하며 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설산의 아래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쬔다.
문득 그런 말이 생각났다. 눈이 내리는 날은 따뜻한 날이라고. 어쩌면 마음이 따뜻한 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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