덱시온은 턱을 한 손으로 괴고 앉은 채 짧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리 수락하고 이야기까지 끝낸 북부의 의뢰가 하필 귀찮은 멘토의 시기와 완전히 겹쳐버렸다. 준비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용병을 데려가기에는 북부는 너무나도 위험했고 변수도 많았다. 만에 하나 이즈멜이 다친다면... 골치 아프다. 지키면서 싸우는 것은 혼자 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으니까. 언제 고등급 마수를 마주할지 알 수 없을 곳에 초짜를 데리고? 차라리 혼자 가고 말지. 이런 귀찮은 일을 떠맡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북부 놈들은 하나같이 다 비정상이어선..."
"부, 북부 분들은.. 대체 어떻길래...?"
"보면 알아. 그 꼬락서니만 보면..."
욕설을 입 안에서 짓씹다가 생각을 이어갔다. 북부는 위험하다. 어떤 돌발상황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 바로 북부였다. 그곳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마물도 뭣도 아닌 바로 사람이었다. 그것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애초에 이해할 필요도 없겠지만. 어찌 되었든 아주 자그마한 방심도 자칫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테다. 지금까지 봐온 모습으로는 그리 못 싸우진 않았으나 정말 중요한 순간에 머뭇거리는 게 버릇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모습이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용병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있어 치명적인 단점이 될 테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굳이 지금 짚어줄 필요는... 없겠지. 지금 말해줬다가는 저 생각 많은 머리 때문에 더 발목이 잡힐지도 모르니. 덱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먼저 걸음을 옮겼고, 이즈멜은 그 뒤를 따라갔다.
"두 개만 명심해 둬."
"뭐, 뭐를요..?"
"첫 번째, 땅 아래를 잘 봐. 눈밭을 기어 다니는 파란색의 줄 같은 것. 그것에 걸리면 발목이 얼어붙어. 그리고 두 번째, 누가 갑자기 도움을 요청하거나 웃으면서 다가오면 절대 상대하지 마."
"...?"
"그거 사이비다."
"...??"
.
.
.
지금 가장 다행인 사실이라고 한다면 의뢰에 대한 내용을 전달받으러 북부의 길드에 직접 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불행인 사실이라고 한다면 아주 운 나쁘게도 눈보라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덱시온은 쯧, 하며 혀를 차곤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극한의 기온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살갗에 스며드는 한기는 늘 소름 끼쳤다.
"보.. 보온 마법이라도, 걸어드릴까요..?"
"너나 잘 걸어둬. 안 그래도 허약하게 생겨선."
허약...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 이즈멜은 애매모호하게 웃어 보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봐도 그런 말을 들을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간 덱시온이 싸우는 모습을 봐온 사람으로서, 그가 그렇게 평가할 만했다고 생각했다. 덱시온의 체력과 전투 능력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눈부신 재능과 노력의 결과물. 그런 사람이 자신을 보면... 그렇게 비칠 만 하지. 웃긴 것이라면 이즈멜의 재능도 엄청났다는 것이지만. 제 나름대로 납득을 끝낸 후 덱시온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하나하나가 강적인 마수들은 그리 큰 적수가 아니었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빌어먹을 기후였다. 사시사철 눈이 흩날리는, 지금은 눈보라까지 몰아치는 설산은 아무리 뛰어난 용병이어도 꺼리는 곳이다.
"이대로면 눈에 파묻혀 죽는 게 더 빠르겠네."
"그- 그게 여유롭게 할 말인가요..?!"
이즈멜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검붉은 검기가 그대로 적을 갈라내고 이즈멜의 마법은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덱시온은 그나마 안심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곧 얕은 방심으로 이어졌다. 이즈멜이 열심히 보조하며 잘 대응했으나 마수에게서 뻗어 나온- 땅 아래에서 기어 다니는 얼음 줄을 피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이즈멜의 발목에 순식간에 휘감기는 푸른색 얼음결정은 다리를 단단히 붙잡았으며, 덱시온은 검기를 준비하고 날리기엔 마수와 이즈멜의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이즈멜은 순식간에 제 몸에 방어장을 둘렀지만 작지 않은 부상을 피하기엔 힘들 것이다.
그 순간 눈부시도록 푸른 검기가 이즈멜의 앞을 스쳐 지나가며 마수의 목이 꿰뚫어버렸다. 마수는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즈멜은 저도 모르게 질끈 감아버린 눈을 조심히 뜨고 앞을 봤고, 덱시온은 순간 경직된 것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타이밍 좋게 잘 도왔죠?"
푸른 잿빛의 목도리를 잘 여미며 걸어오던 그는 마수의 목에 내리 꽂힌 창을 뽑아들며 말했다. 단정하게 땋아 틀어 올린 머리칼의 옆에 자연스레 흐트러지는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사람이다. 덱시온은 짧게 안도감 섞인 한숨을 내쉬며 고맙단 말을 건네면서도,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것도 빨리 온 것이라고 작은 투덜거림도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즈멜은 서둘러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는 것으로 대답하곤 자연스레 시선을 흘려 덱시온을 바라봤다. 마치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언어 없는 질문은 가볍게 넘기고 말을 이어갔다.
"어디에서 온 거야? 근처에 기척은 없었는데."
"근처에 작은 동굴 안에 있었어요. 저도 마침 의뢰가 다 끝나서 쉬고 있었거든요. 일단 같이 가요, 저쪽 분은 다리가 다치셨을 텐데."
"저, 저는 괜찮아요...!! 그, 치유 마법으로, 금방..."
"지금 막 의뢰가 끝나신 것 아닌가요? 잠시 재정비의 시간도 가져야 하잖아요. 같이 가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차라리 잘 됐네. 가서 무기나 좀 손질해야겠어."
북부 마수들은 여러모로 귀찮다는 말에 별 수 있냐며 받아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름의 배려였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눈보라를 피했다. 그러고 나선 그는 이즈멜에게 이쪽으로 오라며 가볍게 손짓했다.
"제가 약학을 배워서 어떻게 하는지 잘 알아요. 발목 좀 보여주실래요? 치료해 드릴게요."
치유 마법으로 할 수 있다는 이즈멜의 말에 내려가려면 마나를 아껴두어야 한다며 약초와 붕대를 꺼냈다. 덱시온은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 나무토막 두어 개를 모닥불 안에 던져 넣었다. 그는 기어이 이즈멜을 설득하고 나서 붕대를 조심히 감아주고 만족스레 웃어였다.
"그, 치료... 가, 감사합니다..."
"딱히 감사인사를 받으려고 한 건 아니니 괜찮아요. 음~, 정 그러면 이름 알려줄래요? 아직 통성명도 못했으니까요."
"아, 저는.. 이즈멜, 이즈멜이라고 해요..."
"저는 류연이라고 해요. 덱시온 씨랑은 이미 구면이고요. 가끔 도움도 받고, 아니면 제가 도움을 드리기도 하고요. 덱시온 씨가 의외로 섬세하지 못해서."
"욕이냐?"
미묘한 높낮이 섞여든 말에 그럴 리가요, 하며 부정했다. 류연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면서 여러 정보들을 들려주었다. 지금 눈보라가 시작되는 시기라 위험하다는 간단한 정보부터 북부에 퍼진 이상한 종교에 관한 것까지. 덱시온은 중간중간 보충설명도 덧붙였다. 대부분이 험담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굳이 짚어보지 않겠다.
"저, 저... 근데, 두 분은... 어쩌다가 친해지셨어요...?"
"... 흐음, 동류의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일까요?"
"안쓰러움이겠지. 미친 사이비들 사이에서 눈이 마주친 것에 대한."
이렇게까지 말하니 진짜 궁금해졌다. 이즈멜은 북부는 대체 어떻길래...라는 질문을 꾹 삼킨 채로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발이 약해지는 것이 조금 아쉬울 정도로. 잠시 동굴 밖을 바라보던 덱시온이 먼저 일어섰고, 류연과 이즈멜도 따라 일어섰다.
"발목은 괜찮아요?"
"아, 네...! 통증도 없고, 다른 불편함도 없어요. 감사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앞으로 2시간은 더 하고 있어야 해요. 마수의 냉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거든요."
류연은 맑게 웃으면서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눈발이 약해졌고, 다른 마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기 가장 적절한 시간이었다. 덱시온은 손에 들린 의뢰서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뢰서를 제출하러 북부의 길드에 들려야 했으니까. 류연 역시 같은 상황이었으니 걸음을 같이 했다. 길드 내부에서 누가 말 걸어도 무시하라고 말하거나, 이상한 짓 하는 사람들에겐 시선도 주지 말라거나... 대체 어떻길래?라는 이즈멜의 의문은 길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해소됐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종교 정도의 느낌이었다. 어두운 실내에 마치 종교를 연상케 하는... 애초에 길드 내부에서 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며... 이즈멜은 최선을 다해 모든 것에 시선을 주지 않았고, 그 사이에 의뢰서를 제출한 덱시온은 이즈멜의 팔을 잡고 길드 내부에서 빠져나왔다.
"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도 오늘은 얌전한 편이었어."
"저게요...?"
누가 와서 말은 안 걸었으니까. 간단한 대답에 이즈멜은 제 나름대로의 납득을 끝냈다. 저런 곳에서 정상인을 만나면 정말 반가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류연도 길드 바깥으로 나왔다. 조금은 질린다는 표정은 다시 맑은 미소로 변했다.
"수고했어요, 두 분. 저는 다른 의뢰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수고했다. .. 잠시만,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이 서부 의뢰서 명단에 올라가있던데."
"아, 보셨어요? 조만간 서부에 의뢰를 하러 갈거라서요. 그때 마주치면 아는 척이라도 한번 해주세요."
류연은 웃으며 말한 뒤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곤 걸음을 옮겼다. 덱시온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다음 걸음을 옮겼다. 북부 길드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마수 한두마리 정도를 더 없앴지만 큰 무리는 아니었다.
"오늘은 유독 하루가 기네요..."
"북부라서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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