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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잃어버린, 찾아오는.

by @Zena__aneZ 2023. 4. 24.

하얀 설원 위를 걷는다. 금방이라도 아스라질 듯한 걸음은 끊기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 그런 걸음과 함께 흩날리는 겨울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하다. 방관적이고 기만적인, 하지만 상냥한 신은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을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힘을 잃는 희망이나 정의와 같은 것들. 잘 두르고 있던 검은 망토가 시린 바람에 휘날린다. 바람 따라 하얀 새 하나가 내려오고, 그는 하늘하늘 흔들리며 내려오는 하얀 새를 제 팔 위에서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검은 망토 위에 어우러지는 보라색 황혼빛의 머리카락이 현실감 없이 흔들린다.
 
"저 멀리 있는 이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련."
 
가느다란 음성이 부드럽게 울린다. 새는 가볍게 지저귄다. 신은 그 모든 말을 알아들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들은 여전히 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어떤 존재보다 차별적이고 이기적이다. 어리석게도 구원을 바라고, 신은 그 누구도 구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정작 신은 그 누구도 구원해 주겠다 직접 약속한 적 없지 않나. 그럼에도 방관적인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 그래서 인간을 구원했고, 모두를 구원해주지 않아 스스로 기만적인 존재가 되었다. 기만적인 존재가 되는 것조차 기꺼웠다. 그만큼 어리석고 순수한 이들을 아꼈으니까. 한때는 자신이 속해있던 세상을 사랑했으니까. 하얀 새는 신의 다음 목소리를 기다렸다. 신은 그 기다림을 눈치채고 녹음 가득한 눈을 떴다. 항상 어려운 일을 시켜서 미안하구나, 그렇게 말했다. 하얀 새는 제 상냥한 주인을 향해 가벼운 지저귐을 내었다. 신은 새가 앉아있던 팔을 들었다. 새를 날려 보내는 손짓이었다. 하얀 설원 위에서, 하얀 새는 신의 배웅을 받아 높이 날아갔다. 온갖 다채로운 흰색이 눈 안에서 어지러이 흐트러지며, 끝없이 날아가는 새는 머지않아 신의 눈 안에서 사라졌다.
사람을 사랑하는 신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직접 내려가지 않았다. 혼란이 야기될 것을 우려한 탓이었고, 그들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해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헛된 희망이라 한다면, 무조건적인 구원을 뜻한다. 신은 전지하나 전능하지 못하다. 또한 전능하나 전지하지 못하다. 그러니 무조건적인 구원은 되려 그들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신이 된 자로서 어떻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혼란을 쥐여줄 수 있나. 그러니 자신이 날려 보낸 아이의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렇게 지켜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부디 행복하라고. 괴롭지 말라고. 다른 고통은 모두 자신이 끌어안을 것이라고 속삭이며. 신은 다시 설원을 걷는다. 녹음 짙은 눈이 거센 눈발 사이에서 여리게도 빛난다. 시린 겨울이라 해도 새싹이 피어나는 것을 증명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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