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계속. 언제나 비가 쏟아지는 세상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수많은 생명, 수많은 희망, 수많은 빛. 하지만 언제나 쏟아지는 비 때문에 하늘은 그저 잿빛이어서 수많은 어둠까지도 잃어버렸다. 세상이 무너질 듯 쏟아져내린 비는 언젠가부터 재앙에서 일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간간이 들어오는 햇살에 기뻐하고, 다시 쏟아지는 비를 평소의 날로 여겼다. 일상에 슬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더 나은 내일을 추구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수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많은 의미들이 떠다닌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기도 한다. 수많은 희망을 잃은 세상이었대도 내 발이 붙어있는 곳은 여전히 이 땅이라서.
"얘, 도망칠 수 있어?"
날이 하얗게 서 있는 대거를 손에 쥐고 사라질 듯 중얼거린다. 원래도 듣기 편한 것은 아니었던 변조음이 계속 부서졌다. 그 흐린 말을 들은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저 너머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플로드는 한 손으로 복부의 상처를 틀어막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대거를 역수로 쥐었다. 그의 앞에 있는 돌연변이 괴물은 쉬운 적이 아니었다. 단 한순간의 방심도 치명적이다. 하지만 플로드는 숙련된 사냥꾼이며, 그의 무기는 급소를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신고 있던 신발에 파란 부스트가 반짝이고, 빠르게 뛰어 앞으로 가 돌연변이 괴물의 급소를 찔렀다. 그와 동시에 괴물의 긴 촉수에 허벅지가 꿰뚫렸다. 사람 하나 구하는 것 치고 가벼운 대가였다. 다리에선 스파크가 튀었고, 냉각수가 피처럼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며 바닥으로 몸이 넘어졌다.
"... 아, 더럽게 아파."
통증으로 경련하는 팔과 다리로 기어가듯 움직이며 그나마 평탄한 곳에 누웠다.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방독면을 벗고, 노란 후드도 걷어냈다. 입에선 새빨간 피가 터져 나오듯 흘러내리고, 녹색 새벽의 눈이 부서질 듯 일렁거렸다. 플로드가 아직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단단히 묶어둔 긴 머리카락은 바닥에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차가운 빗방울과 한기가 상처에 눅진하게 스며들며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든다. 햇살이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참 이상하다, 오늘은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인데 비가 내린다니. 그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손만 간신히 움직여 주머니에서 작은 물통을 꺼내 상처에 들이부으며, 작은 기계를 하나 더 꺼내 관통상이 난 허벅지에 부착하며 밴드를 감았다. 이런 세상에서 혼자 다니려면 이런 약품이나 자가수리 기계 하나쯤 있어야 했다. 이제는 상처가 나아가는 것을 기다리며 혼잣말을 할 힘도 없이 누워선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언젠가의 쓰라린 날을 떠올린다.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리라고. 우리는 불편함을 원했으니, 그 무엇도 외면하지 말자고.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그 말을 이정표 삼아 계속 걸었다. 많은 길을 걸어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망친 그 아이는 왜 이런 곳에 있었을까. 너도 나처럼 불편함을 원했을까. 신을 원하고, 시를 원했을까. 모든 쾌락에 몸을 맡기던 그 도시의 수몰을 지켜보고 싶었을까...
"눈부셔..."
햇살이 밝다.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럼에도 햇살이 눈에 침투했다. 어쩌면 그런 착각을 하는 걸까. 마음 한편이 빗물에 녹아간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그는 머지않아 깰 잠을 청하며 기도한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 작은 것을 지킬 수 있으니 되었다고. 비록 내 친구들을 지키진 못했지만, 나는 그들의 유언을 평생 마음속에 묻고 살아갈 것이라고. 상처는 쓰렸고, 하늘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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