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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돌발 상황.

by @Zena__aneZ 2023. 10. 3.

칸나는 지팡이를 눌러 잡았다. 보랏빛의 눈이 주변을 빠르게 훑는다. 상황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평소처럼 마물과 마주했고, 익숙하게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있다면 마물이 평소보다 수가 더 많았으며 많은 마물을 처리하기에는 인원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칸나는 숙련된 치유사였다는 것, 그리 검을 다루는 것에 대단한 재능이 있던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괜찮겠어요?"

"... 늘 하던 일이야."

알겠어요. 간단히 대답한 후 지팡이를 가볍게 움직였다. 지팡이의 주위에 황금빛이 반짝거리고, 루우의 손등에는 마름모 모양의 문양 세 개가 반짝, 생겼다가 사라진다. 보호 각인과 치유 각인, 그리고 강화 각인. 평소라면 한 사람에게 세 개를 전부 새기지 않겠지만, 지금같이 도움도 되지 않는 전투인원이 많고 부상의 위험도가 높다면 한 명에게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칸나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행동이었다. 단 한 번만 삐끗해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졌으니까. 가장 강한 사람이 대부분의 마물을 책임지고 있는 이 빌어먹을 상황은 칸나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무기를 꺼내 들어 싸우고 싶었으나 자신만큼 숙련된 치유사가 없었다. 어느새 제 앞까지 다가온 한 마물이 강렬한 바람에 휘감겨 산산조각 났다.
 
"기본적인 훈련도 못 끝낸 사람을 동료로 붙여주는 건 실수였어요."
 
빠르게 말을 쏘아붙인 뒤 주문을 쉼 없이 읊조렸다. 영창 마법은 정신력이 배로 소모되어 약간의 피로감이 얹어졌지만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가장 앞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자신마저 태울 듯이 싸우고 있었으니까. 마물에게 검이 꽂히는 질퍽한 소리와 기분 나쁜 금속음이 뒤엉킨다. 익숙한 소음이다. 칸나는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강한 바람은 짙은 보랏빛의 선율로 주변에 흘러들어 갔다. 충격을 줄여주는 노래이자 강렬한 치유 주문.

"루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어요?"

"앞으로 40분. 그게 한계야."

부상과 체력은 별개의 문제였다. 상처가 남는 족족 전부 치료되었지만 체력은 끊임없이 닳고 있었다. 칸나가 평범한 치유사였거나 루우가 평범한 검사였다면 이미 어느 한쪽은 쓰러졌겠지. 칸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전투불능이 된 사람은 없었지만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다 쓰러진대도 루우가 다 처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둘 정도는 죽겠지만 대부분은 끌고 복귀할 수 있겠지. 그게 빌어먹게도 싫었다. 홀로 무언가를 구하는 것에 그 어떠한 숭고한 의미도 없다. 그저 주변인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의 증명일 뿐이니까. 지팡이가 손 위에서 형태를 바꾼다. 두 개의 차크람은 짙은 색을 띠었다. 같이 싸울게요. 치유 각인은 그대로이니 마음 놓고 싸워요. 그리 말하곤 차크람을 던졌다. 강렬한 보랏빛의 궤적을 따라 어지러운 진동이 퍼진다. 주변에 있는 마물들을 약화시키는 장막이 깔리고, 그 사이를 춤추듯 거닌다. 상대적으로 모자란 치유의 힘을 보호와 약화로 메우며 적을 압살 한다. 그것이 칸나의 전투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전투 방식은 루우와 잘 맞았다. 자신을 내던지는 위험천만한 전투는 치유의 힘보다 보호와 적의 약화가 중요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약화의 마법을 광범위하게 걸면서 보호의 힘을 유지할 수 있는 치유사는 몇 없다. 이번에 생긴 돌발상황에서는 치명상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부상의 정도가 적었다. 그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얼추 정리되어가는 상황에서 칸나는 차크람을 다시 지팡이의 형태로 바꾸었다. 치유 마법을 다친 사람들에게, 특히 루우에게 비처럼 쏟아부었다. 끊임없이 쏟아부어가는 깨끗한 힘을 매마른 솜처럼 계속 흡수되어가는 것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이번 전투가 고됐다는 것의 증명이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흐트러지고, 몸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한 것을 그가 잡았다. 칸나는 고개를 한번 흔들곤 시선을 바로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무사해요. 저도 무사하고요. 수고했어요."

 

"너도 수고했어."

 

칸나는 제 앞의 사람을 가만히 바라봤다. 싸우는 것이 익숙한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도 그리 불태워가며 싸우던 때가 있었고, 그렇게 필사적이지 않고서는 못 견뎌하던 때가 있었다. 당신도 그런 때이겠지. 그리고 그런 시기가 어서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상처는 좀 나아졌어요? 치유마법을 그렇게 쏟아부었는데 안색이 안 좋아요."

 

"이건 체력적인 문제라서 괜찮아."

 

"제가 준비해온 열매가 있으니까 그거라도 먹어요. 좀 쉬기도 하고요."

 

사람은 휴식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 어떤 것을 한 후에는 꼭 휴식이 필요하다. 그리 말하곤 지팡이를 한번 흔들었다. 맑은 빛이 휘감기고 남은 상처도 씻어내리듯 낫게 했다. 어쩌면 루우는, 처음에는 칸나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칸나는 이해받으려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든 죽으면 안 되니까. 죽는 것은 슬픈 일이니까.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살릴 수 있으니까. 그뿐이었다. 지금은 루우도 그런 마음을 얼핏 이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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