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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땅거미 질 무렵에.

by @Zena__aneZ 2024. 3. 2.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온갖 어둠과 비난이 난무하는 때. 타들어가는 낮도 차갑게 식은 밤도 아닌 가장 어스름할 때. 머지않아 밤이 찾아오고, 어둠이 세상을 가득 메울 때면 밤을 거니는 사람의 시간이 시작된다.

강렬한 주황빛의 머리칼을 지닌 여성이 가느다란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내리 깔린 그림자가 화답하듯 꿈틀거린다. 에메랄드빛 파도를 닮은 눈동자가 매끄럽게 굴러간다. 그림자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사람보다도 더. 수많은 목소리를 듣는 그림자를 다루는 그는 가만히 숨을 들이켠다. 공중에 떠다니는 모든 정보를 흡수하고 가볍게 날아오른다. 귀 대신 자라난 두 쌍의 날개가 얕은 바람을 일으키더니 몸을 공중에 띄운다. 밤의 찬 향기가 눅진하게 몸속으로 녹아든다. 이윽고 완전한 어둠과 하나가 된다면 빠른 속도로 날아가서는 황실의 어느 한 창가에 도착하곤 가볍게 내려와 한 무릎을 꿇고 예를 다한다. 그 자리에 있던 남성은 그에게 시선을 주다가 말을 잇는다.

 

"그림자단의 대장이 직접 움직여야 했던 일이었군. 무슨 일이 있었지?"

 

"적진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사망 54명, 부상자 203명입니다."

 

그곳에 남아있던 모든 대화기록은 기록구에 담아두었습니다. 그가 말을 끝내자 남성이 미묘하게 표정을 구겼다 편다. 피해가 상당했다. 수고했다는 말을 끝으로 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 그림자 속에 몸을 녹여 사라진다. 기록의 전달자, 전령이었던 그가 그림자라고 불리는 비밀 집단의 대장인 것은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이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고, 또한 그는 훈련된 검사였으니 그를 쉽게 이길 수 있는 자도 없었다. 이제는 적진이 된 곳으로 들어가 정보를 상처 하나 없이 빼내올 수 있는 건 그림자의 대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어두운 복도를 잠시 걷다가 기록실로 들어간다. 수많은 기록구와 책이 빼곡하게 차있는 공간은 그의 작업장이기도 했고, 또한 그가 정말 고요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시선 안에 들어온 사람을 바라본다.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든 백금빛 머리칼을 가진 사람. 밤늦게까지 자료 정리를 하다가 잠든 건지 여러 문서와 기록구가 흐트러져있었다. 그는 가만히 웃다가 제 겉옷을 벗어 춥지 않게 둘러준다. 잘 자요, 언니. 그 말을 나긋하게 건네주곤 초를 끈다. 주변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를 잘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럴 때 확실한 이점이 됐다. 다른 이들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는 채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나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흐트러진 종이를 집어 들어 조용히, 천천히 정리한다. 거의 평생을 그림자로, 전령으로 살아온 그는 밤이 좋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을 지키도록 움직일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오늘 밤도 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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