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속에서부터 비릿한 피 냄새가 치밀어 오른다. 어지럽다. 상처투성이의 손으로 바닥을 그러쥐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언젠가의 어린 날에 올려다본 하늘도 이렇게 맑았던 것 같았는데. 헬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가 어깨에 걸쳐줬던 옷자락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옷 챙겨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었다.
"..."
마법이란 간절함이 불러오는 기적이었다. 마법을 쓰는 이들은 물리법칙을 거스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헬렌은 꿋꿋하게 서서 앞을 바라본다. 마수와 사람이 한데 엉켜 싸우는 모습이 지옥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헬렌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한. 짧은 이름을 불렀다. 헬렌은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접근하는 마수들은 처리할 수 있어. 하지만, 당신. 마나를 죽을 정도로 쓰면 내가 손쓸 수 없어. 그가 지척에 있었으나 헬렌은 어쩐지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부터 들린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다정한 손길로 그의 뺨에 묻은 피를 조심히 닦아주었다. 걱정하지 마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죽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약속해요."
헬렌에게 달려드는 마수들은 모두 한의 무기에 갈라져 사라졌다. 헬렌이 바닥에 손을 모으고 무릎 꿇고 앉았다. 마치 기도문을 읊듯 술식을 외운다. 이윽고 길게 숨을 내뱉는다. 숨에서부터 시작하여 맑은 빛무리가 퍼져 나오며 주변을 눈부시게 밝힌다. 헬렌의 환영술은 강렬한 빛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강렬한 빛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환영술은 속성을 가리는 마법이 아니었다. 기초 중의 기초였기 때문에 특별히 더 강한 속성도, 더 약한 속성도 없었다. 어느 것 하나 뛰어나지 않은 마법이었으나, 반대로 말한다면 잘 다듬기만 하면 가히 최강이라고 불릴만한 마법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환영술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은 없었다. 환영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것과 그렇게 만들어낸 환영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읍..."
속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통증이 느껴진다. 제 손톱이 하얀 살을 파고든다. 환영에 실체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환영이 아닌 창조술에 가까웠다. 다만 환영술은 모든 마법의 뿌리였다. 눈속임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기적, 마법의 시작이었으니. 주변을 가득 채워나가던 빛은 신성한 불길이 되어 마수들을 불태우고 땅을 녹음으로 물들여갔다. 순간 너무 많은 마나를 쏟아부어 마나의 파도에 의한 아득한 고양감으로 정신이 흐려졌다. 속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통증만이 의식을 붙잡게 했다. 헬렌은 넘실거리는 의식을 붙잡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순간 온기가 느껴진다. 어느 순간부터 손에서 흐르던 얕은 피가 멈추었다. 당신, 무모했어. ... 일어설 수 있겠어? 아뇨,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어요. 그렇게 말한 헬렌은 실없이 웃었다. 한은 헬렌을 조심히 안아 들고일어났다. 분명 지옥도의 한가운데였을 풍경이 울창한 숲이 되어 있었다. 한은 헬렌의 몸이 너무 차갑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마나를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것일 뿐이었지만 불안했다. 그것은 한의 근본적인 불안함이었다. 누군가를 또 잃고 싶지 않아 멀리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가 죽는 감각이 두렵다는 마음은 다 버린 줄 알았건만, 그건 또 아닌 모양이지. 걱정했어. 당신이 사라질까 봐. 헬렌이 흐린 웃음소리를 흘렸다. 죽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잖아요. 약속하고 떠나가 버린 사람이 꽤 많아서. 한은 표정을 찡그린 채로 애써 웃었고, 헬렌은 그저 맑게 웃었다. 걱정이 그렇게 많았냐는 질문에 당신에게만 그런다는 대답이 흐른다. 햇살이 내리쬔다. 치열한 전투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