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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순수(純粹).

by @Zena__aneZ 2024. 3. 26.

세인은 정령이다. 세상의 깨끗함을 사랑하는 순수함의 결정체였다. 으뜸이라고 평가받는 정령 중 하나였다. 정령사 중에서 그를 사역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순수함을 사랑하는 정령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란 온갖 검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 힘이 되어줘."

세인을 소환할 만큼의 힘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람은 다르다.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에 한 번 나타나는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모든 가치를 버리고 하얘지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세인은 그런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만큼 순수한 존재는 없다. 세인은 저를 부른 이의 주변을 가볍게 돈다. 산의 푸르름을 한가득 머금은 영혼의 하얀 향기가 마음에 들었다. 다시 소중한 것이 생긴 대도 저 순수함-근본적인 체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고, 또한 선한 마음을 품었기에 쉬이 검게 변할 일도 없었다. 마음에 들었어. 나와 계약하자! 해맑은 목소리를 흘리는 세인은 곧 그의 이름을 물어본다. 달아람. 그 대답에 또한 만족한 듯 웃다가 손을 잡고는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네가 죽을 때까지 옆을 지켜줄게. 나의 주인. 세인이 밝게 웃었다.

"여긴 어디야? 소금 향기가 가득해!"

"남부 도시. 일 때문에 온 거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세인은 주변을 둘러본다. 달아람의 개인적인 의견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세인은 남부라고 부르는 곳이 퍽 마음에 들었다. 하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곳이 어떤 세상이길래 다들 하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걸까? 왜 그토록 체념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하얗게 만든 걸까? 온갖 오염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보다 하얀색이 훨씬 더 나았다. 검은색에서는 참기 힘든 악취가 났으니까. 세인은 하얀 세상을 거닐다가 시선을 옮긴다. 어린아이만큼 깨끗한 존재. 빛바랜 흰색이 아니라, 아무것도 새겨 넣지 않은 흰색이다. 그 영혼은 푸르렀다. 주인, 저 사람 알아? 달아람은 세인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다 가볍게 거둔다. 오늘 호위 대상이야. 너무 다가가지 마. 일반인이니까. 세인은 내심 아쉬워했다. 무척이나 깨끗한 사람이었기에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는데. 그 기색을 알아챈 건지, 달아람은 몇 마디 말을 더 건넸다. 앞으로 자주 올 테니까 아쉬워 말고.
그렇게 말한 이후로 종종 만났다. 세인은 둘의 만남을 빤히 바라본다. 순수한 사람과 하얀 사람.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사람과 새긴 것을 모두 버린 사람.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그 만남 자체가 어떠한 운명의 맞물림처럼 보였다.

"아, 루시아. 내가 오래 자리를 비울 때마다 이 아이가 네 곁에 있을 거야. 꽤 도움이 될 테니까─"

"야호! 안녕~!! 대화 나눠보고 싶었어!"

달아람이 세인을 소개하자 쪼르르 달려가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바다내음 가득한 순수함이 마음에 쏙 들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완전 마음에 들었는데, 너도 내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루시아는 아이 같은 말과 행동에 조금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내심 싫지많은 않았다. 완전히 순수한 호감이었으니까. 서로 같은 순수함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이 또한 운명의 맞물림이라고 칭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세인은 자주 루시아의 곁에 있었다. 위험한 것들로부터 지켜주기도 하고, 대화 상대가 되어주기도 하고 -썩 좋은 대화상대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역할도 착실히 수행했다. 그 모든 행동의 60%는 달아람의 부탁-혹은 지시-이었고, 나머지 40%는 세인의 자의였다. 마음이 동해야만 움직이는 정령이 그토록 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하얀 친구!"

세인은 진통마법에 마비마법을 교묘하게 섞어 루시아에게 걸어준 뒤 품에 꼭 안겼다가 떨어진다. 하얗고 푸른 영혼에서 흐르는 바다의 푸르름이 좋았기 때문에. 루시아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을 건넨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 내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대답해 줄게! 세인은 방긋방긋 웃으며 루시아를 바라본다. 제가 하얀색 머리카락이라서 하얀 친구라고 부르는 건가요? 세인은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소리 내어 웃었다.

"하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어?"

"... 네?"

나는 사람과 같은 시야를 가지지 않아. 평이한 대답을 건네고는 루시아의 주변에 한 바퀴 빙그르르 돈다.

내가 보는 흰색은 영혼의 순수함, 혹은 빛바랜 마음이야. 하지만 너의 눈동자 색은 알아!

사람의 눈은 볼 수 있는 건가요?

조금 달라! 눈은 영혼의 창이거든.

어떤 색으로 보이나요?

사라질 때쯤 다시 밀려오는 꿈결의 색으로 보여.
너희는 그걸 무슨 색으로 불러?

파란색….이라고 해요.

으응, 하얀 친구의 눈은 아주 예쁜 파란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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