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정적의 그늘.

by @Zena__aneZ 2024. 4. 1.

그의 삶은 늘 고요했다. 고요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고요하다고 느꼈다. 이따금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일평생 지독한 고요함 속에서 살았다. 사실 그것은 고요함이 아니라 외로움 따위의 감정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삶을 고요하다고 느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는 꽤 나쁜 것을 타고났다. 이것저것 끌어들이는 체질을 타고난 것이다. 그건 신병도 아니었고, 기가 약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체질이었다. 사람 외의 것이 달라붙고 사고에 잘 휘말리는 것. 누군가는 저주라고 부를만한 것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곧잘 사고에 휘말렸다. 죽을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천운이 겹쳐 살아남은 것도 체질 덕분이었다. 어떤 큰 악재는 다른 악재를 짓눌렀다. 살아남는 대신 다른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고, 어린 나이에도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았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인간관계를 높이 쌓는 것을 멀리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만큼은 살아남겠으나 그의 주변인은 그가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은 씨, 수고가 많아요. 뒷정리도 하고 갈 건가요?"

 

"... 아, 네. 아직 못한 게 있어서... 그것만 끝내고, 정리하고 퇴근할게요."

 

짧은 인사를 마치고 트레이 위에 쌓인 책들을 집어 들어 걸음을 옮긴다. 그는 잘 웃지 않는- 조금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든 상냥하고 다정했지만, 한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물러나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깊은 인간관계를 가져본 적 없었다. 크고 조용한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곳에서는 누군가와 부딪힐 일이 거의 없으니까. 책을 정리하다가 그림자 속에 있는 이를 바라본다. 멀지 않은 날부터 보기 시작한 존재였다. 아마도 악재라고 부를만한 존재. 하지만 그는 그런 악재가 익숙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림자 속에 있는 이에게 말을 건넨다. 좋은 밤이에요. 그림자 속의 존재는 하얀 뼈와 비슷한 손만 내밀어 흔들어 보인다. 자신이 건네준 책에 인사에 대한 정보가 쓰여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같이 작게나마 손을 흔들고는 걸음을 옮긴다. 책을 한 권씩 넣어놓고 나서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어둠이 나지막이 깔려있다. 누군가는 이런 풍경을 무서워할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도서관 안에 켜둔 작은 조명을 전부 끄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긴다. 날이 풀렸다고 해도 밤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춥다. 이유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집은 직장 근처에 있었다. 걸어서는 30분 내외로 도착할 수 있었고 교통도 꽤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중교통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30분 정도 걷는 것으로는 전혀 지치지 않았으니 교통을 이용할 일도 없었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섞여있는 것이 영 불편했다. 사고라는 것은 늘 갑작스럽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그런 체질인 것을 몰랐을 때에는 꽤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다. 가족과 화목하게. 다만 여러 사고가 일어나고, 소중한 사람이 다치고, 이윽고 소중한 가족이 그를 멀리했다. 친구들이 떠난다. 혼자였다.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사고 따위가 연이어 일어나는 것은 악재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진짜 악재는, 소중한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세상이 고요해지며, 밝아도 어두운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고요하네. 잠시 멈춘 발걸음이 또 아무도 없는 집으로 향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약간의 책 냄새와 종이 냄새, 그리고 은은한 허브의 향기가 난다. 크로스백을 가방걸이에 잘 걸어두고 화장실로 향한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는 동안 책 한 권을 꺼내 들어 소파에 앉는다. 밖에서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리가 간간이 들렸고, 도시의 조명이 느긋하게 깜빡거리기도 했다. 단단히 올려 묶은 머리칼을 풀어 내린다.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갈색 머리칼이 구불거리며 흘러내린다. 한참을 책에 집중하다가 화장실로 들어간다. 옷을 한편에 잘 개어두고 몸을 욕조에 담근다. 오늘은 큰일이 있지도 않았는데 너무나도 피곤했다. 너무 고요한 하루여서 그랬을까? 외로웠던 걸까?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 질문을 이어가는 건 무슨 미련일까? 욕조 안에 눕듯 몸을 기댄다. 윗집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지독하게도 고요하며 평온하다.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로지 순백의.  (0) 2024.04.07
기적을 노래하며.  (0) 2024.04.02
순수(純粹).  (0) 2024.03.26
청색 시대와 청춘.  (0) 2024.03.24
꽃바람의 화원.  (0) 202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