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위협이 뒤따른다. 특히나 이런 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세상에 자신을 내던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엘은 그런 세상 속에서 어딘가를 바라본다. 하늘도 땅도 아닌 저 멀리 어슴푸레 물든 곳. 엘의 시선은 항상 그런 알 수 없는 곳을 향했다. 하얀 베일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채로, 입만 겨우 보이게 깊이 내리고 걸음을 옮긴다. 그것이 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알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엘은 온통 하얀색으로 얼굴을 가리고 피부를 숨겼다. 조금 더울지도 모를 곳에서도 덥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 방어막 전개하세요. 곧 시작됩니다."
엘이 읊조리듯 말하자 주변에 강렬한 푸른빛을 머금은 방어막이 전개된다. 검붉은 창이 방어막에 한 번 내리꽂히고 사라졌다. 전쟁터와 다름없는 곳에서 이렇게 평온한 말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엘밖에 없을 것이다. 엘은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후발대의 습격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어요. 지금 우리를 습격한 인원의 2배입니다. 미리 준비된 인원들을 그쪽으로 보내세요. 익숙한 지시를 내리고는 앞을 바라본다. 이미 적군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강하게 전개한 방어막은 쉽게 깨지지 않았으나 오래 버틸 수도 없었다. 엘 님, 준비한 대로 싸우면 괜찮을까요? 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필요할 때마다 정신 소통으로 지시를 내릴게요. 엘의 근처에는 보호술사 하나만 남은 채로 각개전투를 시작한다.
"... 엘 님, 제가 당신의 작전에 처음 참여해보는데...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나요?"
엘은 질문을 던진 이에게 시선만 한 번 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시선을 받은 이는 그 서슬 퍼런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는 사실도 모르겠지만.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대답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본인의 뜻대로 흘러갈 거라는 확신이 오만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오만함에서 비롯된 확신이 아니었다. 엘은 정신계열 이능력을 극한까지 단련한 사람이고, 그의 계획을 뒤엎을만한 변수는 많이 없었다. 변수가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곧바로 현장에서 지시를 내리면 됐기 때문에. 가끔은 지시를 따르지 못해 발생하는 위협은-
엘이 제게 가까이 오는 사람을 바라본다. 순간 방어막이 깨진 것을 보고 보호술사가 당황했으나 엘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가까이 온 사람의 머리를 잡았다. 분명 강하게 움켜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사람의 행동이 일순간 전부 멈춘다. 아, 실수로 다 헤집어버렸네. 홀로 중얼거린 말을 곁에 있던 보호술사는 숨을 삼키고는 다시 방어막을 전개했다. 확신은 강함에서 나온다. 그건 육체적인 강함만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엘은 보호술사를 한번 흘긋 바라보곤 부드럽게 웃는다. 주변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후발대도 무사하다는 통신을 받는다.
"이번 작전도 순조롭게 끝났으니, 복귀해요."
주변은 고요하다. 온통 피로 물들었다. 새하얀 옷에는 피 하나 묻지 않았고, 하얀 장갑은 그저 약간의 오염물질만 묻었을 뿐이다. 장갑은 버려야겠네. 그리 생각하곤 발걸음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