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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흙먼지와 풀내음.

by @Zena__aneZ 2024. 4. 15.

발걸음이 천천히 빨라진다. 처음은 그저 걷는 느낌이었으나, 머지않아 뛰는 형태에 가까워졌다. 몸 주위에 연푸른 선이 감기는가 싶더니, 곧 인간이 낼 수 없는 속도로 뛰며 높이 뛰어오른다. 무너져가는 건물 틈새로 몸을 굴리듯 빼내곤 지면에 발을 딛고 선다. 어두운 밤하늘색의 중단발 머리칼이 흙먼지 섞인 바람에 나부낀다. 차가운 밀빛의 눈이 그 풍경을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작은 핸드폰을 꺼내든다.
 
"내부 크리쳐 처리했어요. 정보도 전송 완료했고요. 건물 무너지는 건 뭐... 어차피 무너질 거였으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으시고."
 
이번 일도 깔끔하고 좋네요. 수고했어요, 첼시. 단골손님이라 조금 더 신경 썼어요. 서로 웃으며 통화를 이어갔지만 통화가 끝나고 나서는 표정이 돌변했다. 이번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쉬운 축에 속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바뀐 세부적인 거래 내용이 영 거슬렸다. 미리 말 좀 해주면 좋았을 것을. 머리칼을 대충 털어내곤 걸음을 옮긴다. 이 구역의 폐도시에는 수많은 식물들이 자라나 있다. 그런 삭막한 도시를 거닐고 있노라면 향긋한 풀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일종의 아이러니였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부드러운 향기. 불현듯 왼팔이 욱신거리고, 축축한 감각이 느껴졌다. 얼마 전 봉합한 상처가 도로 터진 것 같았다.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곤 적당히 멀끔한 건물을 찾아 들어간다. 폐도시라고 해도 아직 시설 일부는 남아있었다. 아파트처럼 보이는 건물 안의 화장실로 들어가선 겉옷을 벗어 터진 상처를 가만히 본다. 이럴 때는 자가치유 능력이 편리하고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익숙하게 치료도구를 꺼내 소독하고 터진 상처를 봉합한 뒤 붕대를 단단히 감아놓는다. 피로 물든 옷은 내버려 두고 여분의 옷을 꺼내 입는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진다. 많이 해봤으니까 익숙하게 할 수 있었다.
 
"..."
 
첼시는 가만히 거울을 바라본다. 오른눈 밑에 자리 잡은 긴 흉터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무수히 많이 덧대어진 흉터를 새겨본다. 언제부터 혼자인 게 익숙했더라. 익숙함을 비집고 기어 나오는 감정은 언제나 불쾌하지 그지없었다. 또 외로운 기분이 든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것만이 빌어먹을 기분을 떨쳐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18살짜리 용병을 찾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실패하면 죽음인 일에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청춘은 언제나 이용해 먹기 좋았다. 죽으면 조금 아쉬울 뿐인 일을 뒤탈도 없이 무사히 끝냈으니 자연히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때는 그런 사실이 같잖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첼시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이는 높낮이가 크게 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첼시, 무슨 일이야?
 
"자리 하나 남았어?"
 
"크리쳐 사냥은 생각 없다고 했잖아."
 
"돈 많이 준다면서."
 
갑자기 돈이라도 궁해진 거야? 그 말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첼시의 상황을 잘 알았다. 그의 상처를 잘 알았고, 또한 그의 외로움을 잘 알았다. 무리하지 마, 너 그러다가 죽어. 역시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간결한 대화가 오갔다. 크리쳐를 사냥한 만큼 액수를 쳐준다는 간단한 룰. 크리쳐가 넘쳐나는 지역을 정리하기에는 대대적인 사냥을 여는 것이 가장 좋았다. 하지만 그게 단순한 정리만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역을 정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생중계되기도 할 것이다. 아마도 공정성을 위한 것일 테다. 전투하는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또 유흥거리가 될 수도 있었고. 첼시는 그게 싫어 크리쳐 사냥에 참가하지 않았다. 아마도 크리쳐를 사냥하면서 선택을 후회하겠지. 하지만 이런 기분에 침체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첼시는 한참이나 크리쳐 사냥을 이어가며 잠시 후회했다. 기껏 봉합해 놓은 상처가 또 터졌고, 몸이 욱신거렸다. 옆구리에는 길게 찢어진 상처도 생겼다. 그는 풀이 드문드문 자라난 바닥에 누웠다.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코끝에는 흙냄새만 맴돈다. 빌어먹게도 과거의 어떤 추억이 생각났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 강렬한 밀빛을 가지고 있던 건 기억이 나는데. 누구였더라.
 
"... 시체?"
 
첼시는 눈을 굴리다 숨을 내뱉었다. 아저씨. 아저씨 아닌데. 그런 말에 픽 웃어버렸다. 아, 살고 싶다. 가치 없게 죽고 싶지 않아. 저 살려볼 생각 있어요?
 
"널 살리면 나에게 뭘 해줄 건데?"
 
"뭐든."
 
딜? 남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첼시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상처가 욱신거렸다. 남자에게서 옅은 풀의 향기가 난다. 아, 살았구나. 이렇게 빌어먹게도... 또 연명했구나.

"어린 게 다 죽은 것 같은 표정이나 짓고."

"아저씨는 나이 많아서 죽은 것 같은 표정 지어요?"

이게 한마디를 안 지고. 그 말에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상처가 욱신거린다. 언젠가는 완전히 괜찮아질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 살았으니 그만 아닐까.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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