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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예술가의 새벽.

by @Zena__aneZ 2024. 4. 18.

얼굴 위에 팔을 올린 채로 축 늘어져있다. 새하얀 손톱이 노란빛 감도는 백색 조명에 의해 빛난다. 창문 밖 휘영청 뜬 큼지막한 보름달은 작업실 내부의 창백함만큼 하얗게 물들어있었다. 사선으로 흩어지는 수많은 빛을 눈에 담아내던 이는 의자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킨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운 나비 박제본과 조각상을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려 눈앞의 캔버스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광기의 시간이다.
갈색 물감 머금은 붓을 캔버스 위로 미친 사람처럼 강렬하게 움직인다. 나무색으로 빚은 보름달이라.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안에 피보다도 붉은 눈이 번들거리는 광기를 머금고 매끄럽게 굴러다닌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미쳐버린 사람처럼. 그림을 그릴 때면 아득한 고양감에 정신이 아찔하게 흐드러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손에 하얀 물감을 집어든다. 갈색 달 위에 하얀 물감이 두껍게, 얇게, 부드럽고 강렬하게 덧칠해진다. 이미 완성작이라 불러도 될 만큼 아름다운 그림이었으나 무엇이,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페인팅 나이프를 들어 그대로 천을 찢어버리려는 듯 높이 들었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는 듯 눈을 감고 있다가 파란 물감을 페인팅 나이프 위에 짜내 덧바른다. 이제는 밑그림처럼 그렸던 나무색 보름달은 온데간데없고 처량하고 외로워 보이는 하얗고 푸른 보름달만이 남았다. 제 몸집보다도 훨씬 큰 캔버스가 온갖 물감이 끈적하게 눌어붙어 여백을 남김없이 채웠다. 이 위에 나비 박제본을 붙일까, 덧 그릴까. 고민되네. 넓은 작업실에 혼자 있었으니 돌아올 대답도 없었건만 구태여 말을 내뱉는 모습이란 진정으로 예술의 신에게 광기를 내려받은 모습과 같았다. 옅은 분홍빛 머금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한다. 비릿한 피맛이 느껴지자 물감이 묻지 않은 옷소매로 입술을 문지르듯 닦는다. 소매에 번진 붉은색을 보곤, 아, 붉은색 나비를 그릴까. 입가에 깊은 미소가 새겨진다. 어딘가 섬뜩하고 무서운 미소. 짧은 금빛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목덜미와 눈가를 간지럽혔다. 그것이 거슬렸는지 가위를 집어 들어 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자르고 바닥에 던져놓는다. 붉은 물감을 집어 들어 두껍게 올려 정성스럽게 나비의 형상을 빚어낸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빼와 나비 박제본을 붙이고, 유리조각과 아크릴조각이 가득 담겨있는 상자도 꺼내와 공들여 붙인다. 달 위에 수 놓인 유리조각과 아크릴 조각, 나비 박제본이 황홀하게 어우러진다. 물감 냄새에 미약한 구역감이 기어올라왔지만 그것마저 좋았다. 어느덧 창밖은 맑은 햇살로 물들었다. 광기에 잠식당한 것만 같은 번들거리는 눈이 여명의 빛으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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