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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생명을 얻은 자 괴물이 되니.

by @Zena__aneZ 2024. 6. 1.

하얀 새를 닮은 이는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다. 이 세상의 처음부터 있던, 이 세상의 가장 오래된 것. 온통 겨울뿐인 대지 위에 선 하얀 새는 모든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에게는 인간도, 마물도 모두 평등했다. 이 하늘 아래에 있는 자 모두 고결한 존재이니. 그래서 하얀 새는 두 존재를 분리해 내었다. 마물을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했고, 인간을 마물의 눈에 띄지 않게 했다.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의 혼란을 막을 수는 있었다.

 

"평화의 시대가 왔어요, 사라 님! 덕분이에요."

 

너희가 일궈낸 것이 어찌 내 덕분이겠느냐고 속삭이던 하얀 새는 환한 웃음을 보인다. 사람들은 설원 위에 불꽃을 피워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또 다른 설원에서는 마물들이 평화롭게 지냈다. 하얀 새는 사랑하는 생명들을 하염없이 품고 살았다. 여전히 그들을 사랑했다. 자신이 상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기꺼웠다. 다만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불안해했고,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걱정했다. 우리의 수호신이 이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이러다가 더 아파지면 어떡하지? 사람들을 지키다가 쓰러진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지?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의 수호자의 생명을 취해 힘을 흡수한다면. 하얀 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굳이 말하지 않은 이유는, 정말 본인의 안위와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 님, 그러다 몸이라도 상할까 봐 걱정이에요."

 

"설마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쓰러지기라도 하겠니."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은 하얀 새는 흰 손을 뻗어 상대의 머리칼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금방 손을 거두고 걸음을 옮긴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괴물이라는 단어가 바람을 타고 넘실거린다. 혹여 마물이 들어왔는지 걱정이 되어 빠르게 걸음을 옮겼으나, 그 빠른 걸음이 멈추는 것은 먼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칼을 들고,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다. 생명을 관장하는 자이니 겨우 그것에 죽을 리도 없었고, 죽을 만큼 아프지도 않았다. 내가 너희를 불안하게 했구나. 그 말이 바람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런 행동은 전혀 상처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황급히 하얀 새에게 다가가 칼을 빼내고 치유마법을 행했고, 또 누군가는 붉은 목도리와 담요 하나를 조심히 둘러주었다. 금속이 훑고 지나간 심장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눈앞에 있는 이들의 눈빛을 더 담아내길 선택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들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었다. 생명을 얻은 자는 끊임없이 틀린 선택을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알려 주었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이고,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고 살아있는 것이 어떠한 기적을 품고 있는지.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생명은 죽고 다시 태어나 이전의 가르침은 잊어버리고 만다. 좋은 이야기는 너무나도 쉽게 잊힌다. 분쟁과 불신은 제 몸집을 불린다. 그럼에도 하얀 새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애초에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으니.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의구심이 들었다. 왜 모든 고귀한 생명은 다른 생명을 빼앗지 않고 살아갈 수 없을까. 지금껏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알려준 모든 마음이 힘을 잃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고... 실망스러웠다. 사랑으로 빚어진 이들이 왜 사랑으로 빚어진 이들을 죽여나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찔렀던 심장의 균열 사이로 심연보다도 어두운 감정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균열이 생긴 것만 같았다.

 

"수호신님, 저희의 공물을 받고 부디 이 생명을 유지하게 하여-"

 

희고 깨끗한 제단 위에 사람이 올려져 있다. 진즉에 생명을 잃은 생명이 즐비하다. 하얀 새는 그것을 눈에 담는다. 이윽고 심장의 균열을 따라 온전한 실망감이 덮쳤다. 이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생명을 얻은 자, 괴물이 되니. 하얀 새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모든 힘을 거두었다. 하얀 눈이 쏟아진다. 온기를 빼앗긴 바람이 불어오고, 마물과 인간 모두를 지키던 경계선이 사라졌다. 내가 너희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구나. 너희는 애초에 그것밖에 모르던 아이들이었어. 하얀 새의 다채롭게 빛나던 눈이 탁해져 온통 뿌연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사랑이 실망감으로 변모하는 것은 한순간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느릿하게,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여 희망의 끈을 놓아 버렸다. 이들은 구제할 수도 없고, 구제받을 가치도 없었다. 다만 또 구석에서 홀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작은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아, 감정이란 쓸모없게도. 하얀 새는 저 먼 설원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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