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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영원히 옳은 것.

by @Zena__aneZ 2024. 6. 10.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정답인 것도, 모든 것이 오답인 것도 없다. 사실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한 것도 없다. 꾸준히 질문을 던진다. 사실, 이곳에 옳은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목소리를 한 신이 대답한다. 옳은 이는 없다. 사실 모든 이가 옳지 않다. 그리하여 영원불멸이란 없다. 옳은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전부 틀린 것이니, 필멸자의 생각이란 틀릴 수밖에 없으니,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고 포용하며 살라.
 
"..."
 
오묘한 황혼색의 눈을 가진 이는 책장을 넘기며 글을 읽는다. 꽤나 오래된 고서는 강렬한 파동을 간직한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낡은 종이 속에서 튀어나와 파란을 일으킬 것만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고서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다른 사람이나 찾는 책이었다. 오래된 지식은 이렇게나 강렬하게 잘못된 것을 짚고 있는데... 에리카 씨, 부상자가 생겼어요!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보고 있던 책에서 시선이 떨어진다. 그는 의자를 박차고 달려 나간다.
그는 사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북부의 성당에서 지냈다. 부모가 없어도 부모와 다름없는 다른 사제들이 있었고 형제와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늘 성당 안에서 생활하다 보니 신앙심도 남달랐다. 그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신을 사랑했고, 신이 굽어살피는 사람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것을 배우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받아 마땅한 세상이었다. 비록 풍족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행복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은 어느 날 깨졌다. 아주 하얗고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와서 에리카와 에리카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성당의 어른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저 갸웃거리다가도 성가대 옷을 입은 사람들을 큰 의심 없이 따라갔다. 이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북부의 작은 도시의 외곽에 있던 성당에 마물이 들이닥쳐 아이들만이라도 데리고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것은 어린아이들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신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어린아이들을 성당 안에 두고 이단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노한 신이... 무언가 이상했다. 이단은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배웠는데. 그렇게 다정하던 사람들이, 정말 이단이었을까?
 
에리카는 그날 이후로 이제까지 배우지 못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고. 모두를 사랑해야 마땅하나 신이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고.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말이었다. 여태까지 배워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말을 마음 한편에 잘 밀어 넣고 오래된 책을 읽는다. 오래된 지식, 잘못되었으나 그만큼 다양한 말들을 배운다. 이윽고 깨닫는다. 북부에서 소수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받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 따위를 말이다. 모든 불합리함은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지 않았다. 나와 내 친구들을 데려가려 하는 그 다정한 것만 같은 손길을 뿌리치고 우리를 키워주던 어른들을 찾았으면, 그들이 멀쩡히 살아있었을까? 그런 고민들도 해봤다. 하지만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바꿀 수 있다고 한들 개인의 생명을 걸어야 할 것이다. 에리카는 죽음이 무서웠고, 타인이 무서웠다. 그래서 먼저 나서지 못했다. 이것이 틀린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소중했던 목숨은 그들에게도 소중했을 텐데.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얻으면서, 세상에 대해 배워가면서 기묘한 패배감은 커져만 갔다. 틀린 것을 따르는 자신에게 환멸감이 들끓기도 했다. 이윽고 성인이 된 에리카는 더 이상 밝게 웃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이 과거의
누군가처럼 상처 입히는 사람이 될까 봐 치유사제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어릴 적 자신의 손을 잡아 이끌던 이와 같은 옷을 입고 사람들을 살린다. 그것만이 회개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행동이 옳지는 않을 것이다. 틀린 것을 알면서도 제 생명이 소중해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또 죽는 것은 싫어서. 그래서 사람들을 구하러 걸음을 부지런히 옮긴다. 마냥 옳은 것이 없다면, 마냥 틀린 것도 없을 거라고. 강렬한 분홍빛의 머리칼이 설원의 바람에 나부낀다. 북부는 온통 시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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