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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 로그

그리고, 우리는 없었다.

by @Zena__aneZ 2024. 7. 14.

말소당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릴없이 사라지고 찢어발겨진다. 살아있었으나 살아있지 않았고, 틀림없이 존재했으나 존재한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의미마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없이 많이 피어오른 꽃들 중 한두 개쯤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아스포델은 딱 그 정도의 위치였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 단지 태어날 곳을 고르지 못했기에 마계의 독에 노출된 꽃에서 태어났으니, 그것이 치명적인 결함이 되었다. 꽃에서 태어나는 신비로운 종족이었으나 그런 이들이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또다른 이야기였다.
세상에 피어난 꽃은 아름다움보다도 슬픔을 더 크게 알았다. 가장 신비롭게 만들어진 존재가 세상의 슬픔만을 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은 애틋함이라...

 

"아스포델, 지금 있어요?"

 

"... 아, 네. 찻잎을 받으러 오셨나요?"

 

"인기가 좋으니까요. 당신이라는 것을 숨겨서 인기가 많은 거겠지만... 다들 바보같다니까. 마계의 독은 전염되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고정관념이란 아주 무서운 거니까요."

 

아스포델은 눈가와 다리에 무성하게 자라난 꽃들을 느끼다가 걸음을 옮겼다. 주렁주렁 매달린 식물들이 아스포델의 손으로 줄기를 뻗었다. 검푸른 마나가 흘러들고, 짙은 보랏빛의 꽃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매달린다. 작은 가위를 들어 꽃들을 잘라 투명하고 깨끗한 통 안에 가득 쏟아붓는다. 어딘가 오묘하고 기묘한 향기를 풍기는 꽃잎이 유리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듯 움직였다. 모두가 그 빛깔을 신비로워하고 많은 이들이 원했으나 그의 존재만큼은 철저히 무시된다. 아스포델은 짧은 생각을 갈무리하곤 저를 찾아온 이에게 유리병을 건넨다. 잘 부탁해요. 당연하죠, 언제나 그랬듯이 잘 팔고 올게요. 짧은 대화에는 단단한 신뢰감과 옅은 애틋함이 있었다. 둘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고, 아스포델의 친구였던 이는 그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이 쓰였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었으니.

아스포델은 오랜 친구를 배웅하고는 잠시 어지러워진 머리를 창백한 손으로 짚었다. 한가득 피어난 꽃의 지독한 향기에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통해 지독하리만치 향기로운 꽃내음이 흩어지고 그 사이를 차가운 바람이 가득 채운다. 강렬한 피로감에 방 한편에 놓인 작은 침대 위에 누웠다. 식물이 무성하다. 꽃에서 태어난 이의 몸 위에 피어난 꽃들도 무성하다. 이따금, 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향기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꽃에서 태어났으나 그것이 저주받은 꽃이라면, 그의 생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피어올라 무성해지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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