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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겨울의 종말.

by @Zena__aneZ 2024. 8. 14.

류연은 창을 움켜쥐었다. 대의 끝에 만들어낸 창날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게 일렁거린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피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토할 것만 같았다. 숨을 내쉬는 것이 버거웠다. 찢어진 상처 사이로 흘러드는 한기에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이렇게 아픈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통증만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다 풀려버린 보랏빛 머리카락이 피를 머금고 반짝였다. 고대 마물이라는 것은 갑자기 깨어났고, 그것을 막기 위해 많은 용병이 동원되었다. 고대 마수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대로 의식이 붙어있는 것은 그밖에 없었다.

류연은 어느 상황에서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물러서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주 특별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사실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두려워도, 결코... 류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고대 마물을 바라보았다. 창을 꾹 움켜잡고 배운 대로 창을 휘두른다. 거의 다 죽어가던 마물은 창질 한 번에 크게 베여서 쓰러진다. 마물의 독이 상처 사이로 스며든다. 순간 몸이 고꾸라질 뻔했다. 바닥에 찍은 창으로 어떻게든 몸을 지탱했으나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상처를 통해 생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시야가 멋대로 울렁거리고, 신체 말단 부위부터 마비되어 가는 감각이 선명해서... 강렬한 통증과 마비되는 듯한 감각이 토할 것처럼 뒤섞이고 일렁거린다. 류연은 이런 감각을 처음 겪어보았지만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겨우 걸음을 옮겨, 아직 꿈틀대는 고대 마물을 보다가 창을 높이 들고 그대로 마물의 핵을 찔렀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 비명, 파열음이 뒤섞여 흐른다. 마물에게 깃들어있던 마력이 류연을 그대로 덮쳤다.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기어이 무기를 손에서 놓친다. 단 한 번도 무기를 놓치는 일이 없었던 이는 그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상처에서 보랏빛 결정이 기어올라온다. 생명이 빠져나간다. 눈밭 위로 몸이 넘어진다. 눈에서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것이 떨어진다. 신체가 전부 결정화되기 전에 죽을 것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부상이 너무 깊었다. 이대로 산다고 해도 얼마 못 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류연은 숨을 내뱉었다. 평소라면 입김이 나왔어야 하지만 그저 찬 숨만이 흐를 뿐이었다. 춥다. 지독하게도 추웠다. 가물거리는 시야 안에는 그저 잿빛의 눈밭만이 보였다.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류연은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 대표님."

 

고개를 들었다. 목이 뻣뻣하고 뻐근한 느낌이었다. W는 아무런 말도 없이 류연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얼음장 같은 몸을 안아 들었다. 여전히 너무 가벼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는 어렴풋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이 슬픔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차갑게 굳어가던 몸에 결정화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류연의 몸에는 생명력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온갖 감각이 소용돌이처럼 말리는 것이 멈춘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서웠다. 아플 때보다도 더 무서웠다. 죽음이 눈앞에 닥치니, 그제야 두려워졌다. 사실은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였을 뿐이었는데.

 

"대표님, 저 무서워요."

 

목소리가 옅게 떨린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너무 무서워요. 이게 이상한 걸까요? 떨리던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마치 불씨처럼. 생명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직전, 눈에 담은 것은 시리도록 푸른 잿빛뿐이었다.

W는 차갑게 식은 몸을 안아 들고 하염없이 걸음을 옮겼다. 설원은 여전히 혹독하게 추웠다. W가 북부를 떠났던 그날처럼.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애석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악몽은 끔찍했다. 아마 한때 친우라고 여겼던 이도 그런 기분이리라 여겼다. W는 차갑게 얼어붙은 사람을 바라본다. 끝내 살고 싶다고 하지 못한 이를 바라본다. 가만히 감은 눈이 옛 친우를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째서 희생하는 사람은 늘 강인하며, 하릴없이 사라지는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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