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드리운 장막이 조약돌처럼 단단해진다. 가장 깊고 어두운 것. 여명은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게 밝아오는 빛의 장막이었으나, 모든 밝아오는 것은 어둠 다음에나 있다. 그것은 희망인가? 혹은 희망조차 되지 못한 검은 웃음 한 자락이었나?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밝게 웃는 것이 희망이노라 한다면 아니, 아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다. 어찌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이, 절망이, 울음이, 그 모든 것이, 말갛게 뜬 태양빛이 부끄러워 숨어버리고 마는 것이 어찌 희망이겠느냐고.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고 밤은 여전히 밤이고 조약돌마냥 단단해진 장막은 마치 착색된 불행과 같다. 아무리 어둠이 짙대도 아침이 찾아온다는 말이 말간 희망이라면 단단하고 어두운 것은 대체 무엇인가? 세차게 뛰는 심장에 어찌 치기 어린 기쁨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심장의 뜀은 본디 생명의 영위라, 세차게 뛰는 심장을 으깨 만든 모든 것이 어찌 희생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 우리의 심장은 조약돌처럼 단단한 밤의 장막 속에서 세차게 뛰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우리는 늘 희생한 이들을 기리는 삶을 살고 있을진대, 어찌 이 심장이 세차게 뛰지 않을 수 있으리. 우리는 세차게 뛰는 심장을 다 부러진 손톱으로 긁어모아 이 단단한 어둠을 부술 수 있노라고, 그것이 설령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미 다 부러진 손끝에서 아픔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지 않은가? 이 밤에 다 부서진 손끝으로, 다 부서진 심장으로 아침을 맞이하면 한 줌 빛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들어보라, 다시 생각해 보라.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어둠은 여전히 어둠이고 두려움은 여전히 두려움이라면, 빛은 여전히 빛이고 희망은 여전히 희망일진대.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잘못되지 않았나? 우리는 기어이 아침을 찾을 것입니다,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이 까맣게 그을렸는데, 까맣게 타들어가게 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정당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수많은 질문에 그것보다 더 많은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면, 단 하나로 정해버린 기괴한 해답이 가장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기어이 아침을 찾았다. 수많은 질문과 그것보다 더 많은 해답을 끌어안고, 사실은 그 어떤 것도 해답이라고 여기지 못한 채로 조약돌마냥 단단한 어둠 다음에 찾아오는 쌉싸름한 여명을 맞이한다. 희망조차 되지 못한 새카만 것을 짓밟고 일어서서 울지도 웃지도 못한 얼굴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착색된 불행이 여명의 빛을 받고 밝게 빛난다. 서럽고 외롭던 밤의 끝에는 궁전 천장에 들이차는 빛과 같은 햇살이 판을 쳐서, 나는 그 햇살에 마치 체한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체할 것만 같은 햇살을 몇십 번이고 더 마주한 다음에야 깨달았다. 그 불편하고 더부룩한 감각이 바로 희망이었다는 것을. 다 밟아 죽여놓은 줄만 알았던 희망은 부피만 죽어라 하고 커서 그렇게 속이 불편했다. 다 죽였다고 믿어버리는 유약함이 나의 기괴한 해답이 되었고, 그 해답을 저만치 밀려나게 하자 드디어 불편하지 않았다. 인정과 이해가 있어야 비로소 굳건하게 서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침을 찾을 것입니다.
늘 그랬듯이.
지금까지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축복을.
이제 막 밤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굳건함을.
밤의 한가운데 서있는 사람들에게 꺾여도 일어날 힘을.
가장 어두운 밤에 영원히 남겨진 사람들에게 안식을.
조약돌 같은 어둠 속에서 혈류를 타고 흐르는 외침을 드디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게 됐습니다.
첫 번째 장에는 자유를 쓰고,
두 번째 장에는 희망을 쓰고,
마지막 장에는 우리를 씁니다.
내일을 맞이할 이들을 위하여.
내일을 빼앗긴 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희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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