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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하얀 마음에 바람을 얹어.

by @Zena__aneZ 2024. 1. 1.

달아람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와 같았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된다면 자신이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 싫었고, 또한 한 사람에게 어떠한 기대가 집중되는 것도 싫었다. 유능함에 달라붙는 기대를 경계하고 귀찮은 일을 회피하는 사람. 달아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가 마냥 귀찮아서 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았겠으나,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귀찮은 것이 싫다'는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3등급. 높지도, 낮지도 않은 등급. 그저 그런 등급이었으나 실제 실력은 2등급을 웃돌았다. 잘만 한다면 1등급 뱃지를 당당하게 달 수도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3등급 정도면 충분히 동부에서 지낼 수 있었고, 남부에도 갈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특수한 체질 덕분에 이곳저곳 많이 불려다니는 입장이었으니 금전적인 문제도 없었다.

 

"..."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조금 더 높은 등급을 달아놨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아람은 스태프를 들었다. 초승달 모양의 달이 맑게 빛나는 듯 하며 제 앞의 이들을 감쌌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안전 지대까지 인도해주고 오염을 흡수하는 이의 곁에 서서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달빛 닮은 빛이 대지에 스며들어 주변을 보호하듯 느릿하게 일렁였다.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구나."

 

달아람은 자신이 입고 있던 맑은 녹색 겉옷을 벗어 루시아의 어깨에 잘 둘러주었다. 걱정의 눈길 한 번 보내다가 스태프를 가로막듯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여기서 더 능력을 쓰면 죽어요. 사람 목숨이 장난같으면 더 시키던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분명한 경고였다. 조금 더 쓴다고 정말로 죽진 않겠으나 마음은 확실히 죽는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살아간다면 편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물러가고 나서야 바닥에 달빛처럼 일렁이던 빛이 사라진다. 달아람은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듯이. 정신이 없어서 이름도 못 물어봤네. 이름은? 짧은 침묵 이후에 루시아,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달아람은 루시아가 그 존재만큼 하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루시아의 하얀 머리칼처럼, 마모된 마음에 내려앉은 하얀 체념처럼, 하얗게 빛바랜 시선처럼. 조금 쉬다가 돌아가자며 말을 얹는 것에 내비치는 불안은 학습된 불안함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말 쉬기만 하고 가는 거니까 걱정 마. 거기까지 말을 얹고 나서야 얕은 떨림이 가시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친절함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친절함 뿐만 아니라 많은 감정에 대해 몰랐다. 감정을 배울 기회, 조금 더 나아가서는 사회생활을 할 기회도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것은커녕 자신의 마음 한 줌을 알아채는 것도 어려웠다. 남들과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저주였으며 또한 악몽이었다고. 하지만 루시아는 늘 그런 삶을 살고 있었으니 어느 것이 더 나은지도 알기 힘들었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체하기도 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자신의 노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바뀌지 않는 것에 매달리는 것만큼 바보같은 행동이 또 어디에 있는지. 그러니 체념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긴 시간이 지나서 마주친 친절에 목을 맬 정도로 간절한 것은 아니었으나, 외면하기에는 한때 너무나도 바라던 형태의 다정함이었어서.

 

달아람은 그 일 이후에 종종 남부에 찾아왔다. 열에 셋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다른 넷은 남부에 있는 정부와의 협업 때문에, 나머지 셋은 오로지 루시아가 이유였다. 그녀는 이것저것 끌어들이고 잘 보는 특이체질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오염된 것을 정화하는 일에 특화되어 있었다. 등급이 더 높았다면 북부와 서부에도 불려갔겠으나 3등급이라는 이유로 주로 남부와 동부를 오간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루시아와 더 많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 흡수해서 정화하는 능력이라니, 얼마나 편리하고... 저주스러운 능력인지. 남부의 빌어먹을 시스템은 소수를 지키는 것보다는 소수의 희생을 더 중하게 여겼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속이 뒤집히는 기분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니 달아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다. 사람을 지키려고 든 무기였으니까.

달아람은 스태프를 든다. 부드러운 빛이 주위를 감싸고, 신체로 오는 모든 부담을 대폭 줄여주는 마법을 건다. 그녀의 사역마가 루시아의 주변에 서서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린다.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해도 돼. 아프지 않을 거야. 그러니 괜찮아."

 

세상을 한 사람이 바꿀수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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