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그리하여 완성된.

by @Zena__aneZ 2024. 1. 4.

류연은 성숙한 사람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이 세상은 부모님 없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다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어렸던 맏이인 큰오빠가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는 것을 보며, 막내인 류연은 내가 결코 짐이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류연은 자신이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법을 제대로 배우는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시간과 돈이었다. 마법을 제대로 배우는 데에는 많은 것이 필요했으니까. 짐이 되지 말자고 다짐한 순간부터, 류연은 마법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가장 잘하는 것을 하기로 생각했다.

류연은 운동신경이 좋았고, 전투에 재능도 있었다. 여러 날에 걸쳐, 집에서 조용히 나가 잡기 쉬운 마물부터 하나씩 잡아본다. 서투른 창술이 작은 상처를 입은 끝에 정돈되길 몇 차례. 다른 사람들의 모양새를 적당히 흉내 낼 수 있게 됐을 때가 류연이 13살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더 실력을 늘릴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누군가를 보았다. 깔끔한 반원을 그리며 마물을 갈라내는, 창술 특유의 투박함을 담고 있지만 마냥 우아한 모습.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제 근처로 다가온 마물을 눈치채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은 류연을 보고 놀란 듯하다가 아직 작은 아이의 몸을 바로 감싸 안고 마물을 찔러들었다. 허공에 그려지는 궤적을 눈 안에 끝까지 담다가 제 몸을 감싸 안은 상대를 바라본다. 아가, 이곳은 위험해. 류연을 저를 조심히 놓아주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여성은 어쩐지 제 큰오빠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르면서도 같은 형태의 다정함. 류연은 반쯤 충동적으로 말을 건넸다. 저한테 창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세요.

 

아우룸피아는 제 앞의 아이를 바라봤다. 기껏해야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이는 꽤나 당황스러운 부탁을 건네온다. 아마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바로 거절했겠으나 아우룸피아는 이런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간절함. 아우룸피아는 그런 눈빛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절 대신 질문을 건넸다.

 

"왜 창을 다루는 것을 배우고 싶어?"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요."

 

지킴받는 것보다,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이는 아우룸피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직 여리고 작은 아이였지만 대답만큼은 성숙했다. 무엇이 아이를 벌써 어른으로 만들었을까? 그런 고민의 끝에는 다정한 미소가 걸린다. 좋아. 하지만 그전에 치료 먼저 받자. 아우룸피아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허술하게도 생긴 창을 양손으로 꾹 잡고 있던 아이는 한 손을 조심히 내밀어서 손을 맞잡았다. 아이는 아우룸피아가 품은 태양빛 눈과 머리칼의 색만큼이나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둘은 자주 만났다. 둘이 만나는 시간보다도 아우룸피아의 친우인 디에스와 함께 셋이서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창뿐만 아니라 쌍검과 활을 다루는 방법도 익히게 되었고, 둘의 가르침과 류연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천부적인 재능이 합쳐져 더욱 빠르게 많은 기술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류연은 그런 시간들이 진심으로 좋았고, 아마 다른 둘도 비슷한 마음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좋은 시간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디에스는 고대 생물의 토벌에 참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그것은 류연에게 있어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좋은 사람은 쉽게 상처 입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더라.

 

"선생님, 괜찮으세요? 그니까..."

 

"살아남은 것만으로 충분한 행운이지. 너무 마음쓰지 마."

 

류연의 머리칼을 조심히 쓰다듬는 손길이 퍽 다정하다. 류연은 침울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제가 다짐한 것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준 이들에게 보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선생님, 제가 꼭 선생님을 지켜드릴게요! 말만으로도 너무 고마운데? 그런 말들도 오가고 결국은 얕은 웃음소리가 흐른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이제 류연이 19살이 되었을 때, 첫 등급전을 치르러 가는 길에 오른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말에 아우룸피아와 디에스가 시선을 한 번 주고받곤 웃어버리고 말았다. 류연은 잘 몰랐지만, 어느덧 다 큰 소녀는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높은 등급을 쉽게 따낼 수 있을 정도로. 걱정 말라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토닥이는 것은 마냥 빈말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류연은 특히나 실전에 강한 편이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대로, 그리고 류연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훌륭한 성과를 거둬들였다. 처음부터 2등급 뱃지를 손에 잡았다니. 마냥 멀게만 느껴지던 것이었는데. 손에 들린 뱃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곧바로 남부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처음 무기를 잡고자 했던 이유를 드디어 달성했다. 이제는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선생님!!"

 

류연은 어느 때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떨어진 밤에.  (0) 2024.01.07
붉은 보석의 비.  (0) 2024.01.05
하얀 마음에 바람을 얹어.  (0) 2024.01.01
탐사 의뢰.  (0) 2023.12.21
돌발 상황.  (0) 2023.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