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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붉은 보석의 비.

by @Zena__aneZ 2024. 1. 5.

권태롭게 빛나는 황금색 조명 아래 놓인 와인색 가죽 소파에 파묻히듯 누워있던 스피넬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황금색 빛을 그대로 받고 있었으나 칠흑 같은 눈은 그 어떠한 빛도 허용하지 않았다. 유리 테이블 위에 팔을 뻗어 잠시 더듬거리며 손을 움직이다가 곧 담배 한 갑과 고급스러운 은색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여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매캐한 연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을 좋아했다.
스피넬은 담배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골초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담배를 피우는 것에서 안정을 얻는 사람이었기에 얼굴의 반절을 덮는 흉터가 욱신거릴 때면 다시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는 것이었다. 입에서 회색 연기가 흩어져 흘러나온다. 아, 지금이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일으켜야 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나도 귀찮았으니 잠시 더 누워있기로 했다.
문득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얼굴에 있는 흉터가 욱신거렸다. 흉터가 만들어진 날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문득 스피넬은 제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보석을 이름으로 붙이는 가족이라. 겨우 그 정도의 가치인지. 스피넬은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반쯤 풀어헤친 넥타이마저 불편했는지 저만치 던져놓는다. 작은 움직임에 짙은 적색의 머리칼이 결 좋게 흐드러져 피부에 닿는다. 거슬리게도.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뒤에 다시 천장을 바라본다. 권태롭다.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 없었지만. 어느새 담개 한 개비를 다 피워갔다. 다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뱉어낸다. 매캐한 연기 속에 파묻혀 있는 여인의 모습은 지나치게 고혹적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문득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스피넬은 짐짓 표정을 구기다가 몸을 일으킨다. 큰 유리잔에 투명한 갈색 술을 가득 담아 목을 축인다. 들어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 집무실에 노크까지 할 정도면... 누군가 보낸 사람이겠네. 아니면 아버지가 붙인 사람이려나. 적을 많이 두고 있는 스피넬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않았다. 굳이 들어오게 하지 않아도 됐었지만, 왠지 호기심이 동했다. 답지 않게.

"오늘부터 아가씨의 경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선택한 방식은 그쪽인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상대를 바라보다가 술을 들이켠 뒤에 컵을 내려놓았다. 목숨이 아깝다면, 좋아, 한 번 해봐. 경호. 도발적이고 매혹적인 웃음. 누구라도 본다면 홀릴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위협적이다. 스피넬은 텅 비어버린 유리잔을 들어 상대를 유리잔에 담아내듯 바라본다. 죽은 다음에는 박제를 할까. 농담이니 웃어. 스피넬은 담배를 입에 다시 물었다. 이 첫 만남이 어찌 흘러갈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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