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파도 앞에서 끝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을 쌓고 있다고. 모든 정성스러움의 끝은 결국 무가치함이라, 나는 삶의 무가치함에 대해 논할 수밖에 없었다. 만든 모든 것들은 결국 수몰되었고, 그것의 진의는 사라지며, 의미를 잃은 것만이 부레 잃은 물고기처럼 영원히 떠돈다. 파도의 포말이 하얀 꽃잎처럼 흩어지며 쌓아온 것을 또 무너트린다. 무한히 떨어지는 돌을 굴리는 사람처럼 모래를 끌어다가 또다시 성을 쌓는다. 어째서 나는 이토록 모래성을 쌓고 있는가. 다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라 아무리 논해도 과정과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또다시 그런 생각을 한다.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쌓는 것은 어떤 미련이며 회한인가. 하나의 행동에 깃든 감정은 수백 가지라 내 진의를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라건대, 내가 쌓아 올린 모래성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방벽이 되길. 그렇게 한 명이라도 덜 상처받는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페탈룸 씨, 요즘 무리하는 거 아니야?"
"쓰러질 정도는 아니니까 신경쓸 것 없어."
손에 생긴 야트막한 상처를 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용병에게 이런 작은 상처가 무슨 대수라고. 가볍게 손을 털어내다가 시선 안에 들어오는 높은 사람을 보곤 표정을 왈칵 구기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싫다. 그것은 조금 더 근본적인 혐오였다.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싫었다. 끔찍하게 싫었다. 가족을 잃은 순간부터 그들을 혐오하기로 다짐했다. 가족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가족 중 한 명이 버림패가 된 것은 오로지 높으신 분들에 의한 판단이었기 때문에. 이유가 있었던 혐오는 어느새 몸집을 불려 그 상류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향했다. 토할 것 같아. 서둘러 걸음을 옮겨 제 일터로 향했다.
마물은 여전히 많았다. 화려한 색을 입은 마물들부터, 괴수라고 부를만한 것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바닥에 이질적인 녹색 줄기들이 기어다니다가 괴수를 옭아맨다. 레이피어를 손에 들고 순식간에 마물 하나를 꿰뚫는다. 항상 익숙하게 해 오던 일이 오늘따라 버겁다. 아까 떠올렸던 과거의 파편 때문이었을까. 멀미 섞인 묘한 부유감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언니, 언니..."
어떤 아이가 손을 잡는다. 아이가 울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그런 감각을 무시하고 자세를 낮춘다. 무슨 일이야? 퍽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아이는 울며 말한다. 제 언니가 위험해요. 언니도 용병인데, 혼자 갔다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눈앞이 까맣게 암전 되는 것만 같았다. 가족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같은 과정에 놓인 사람을 무시할 수 있을까? 아이를 안전한 곳에 두고, 레이피어에 달린 방어 마법을 발동시켜 아이에게 쥐여준 뒤 혼자 달려간다. 바람이 살갗을 훑고 지나가 미묘한 통증을 남긴다. 이윽고 도착한 곳에는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 할 수 있어. 손을 뻗는다. 바닥에서 식물이 자라난다. 거대한 괴수를 옭아맬 때쯤, 손끝에서 녹색 식물이 자라나 손을 타고 올라온다. 끔찍하게 아팠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저와 같은 아픔을 겪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속이 울렁거린다. 아까 느꼈던 모든 감정이 한데 엮인다. 혐오, 슬픔, 죄책감. 어린아이에게 나와 같은 아픔을 겪게 할 수 없다는 말 아래에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내가 울며 도움을 요청했을 때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그때. 나만큼은 외면하지 말자고. 입술을 짓씹으며 식물을 다룬다. 괴수가 쓰러진다. 치명상을 입어 눈도 뜰 수 없어 보였던 사람이 얕은 신음을 흘린다. 식물이 팔을 거의 다 집어삼킬 때쯤 의식은 아득해진다.
나는 모래성을 쌓는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온 생에 걸쳐, 파도 앞에 서서 모래성을 쌓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쓸려나간 자리는 그저 공허하기만 하지 않으니. 모래성이 쓸려나간 자리에는 녹슬지 않는 조개 껍데기가 있었다. 결 좋은 녹음 가득한 머리카락이 바닥에 흐트러진다. 강렬한 꽃잎의 두 색을 머금은 눈이 하늘을 본다. 나, 이번엔 지켰어. 같은 아픔을 겪게 하지 않았어. 저 멀리서 어떤 말소리가 들린다. 그건 아마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 이번에는 지켰네. 그 생각을 끝으로 아득한 의식에 몸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