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태양같은 사람.

by @Zena__aneZ 2024. 2. 18.

머물러 있지 말고 흘러가.
다음에는 더 많은 것을 봐야 해.
너는 내가 사랑했던 햇살이니까.


 
 
그날따라 느낌이 좋지 않았다. 유난히 피로한 느낌이 강했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았고, 다른 사람들은 크게 상처 입거나 죽었다. 멀쩡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버건디밖에 없었다. 손이 옥죄는 느낌이 강했으나 장갑을 벗을 수 없었다. 마나가 바닥났다. 와이어 줄을 위태롭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다른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버건디가 그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몬차, 더 버틸 수 없어. 곧 방어막이 깨질 거야."
 
버건디의 애칭을 부른 사람은 반쯤 부서진 스태프를 손에 꾹 쥔 채로 말을 잇는다. 백금빛 머리칼은 누군지도 모를 이들의 피로 얼룩진 채로 정신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버건디는 그 사람의 백금빛 머리칼을 조심히 넘겨주고는 검을 고쳐 잡는다. 위험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라임, 방어막 계속 유지하고 있어. 최대한 빨리 해결할게. 죽지 않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네가 원한다면. 방어막 밖으로 향한다. 보랏빛 연기가 지천에 깔린다. 입 안에 해독약을 넣어 까득, 깨물고는 빠르게 몸을 움직인다. 몸에 남은 기다란 상흔을 따라 불타는 것만 같은 통증이 기어올라왔지만 통증을 모른 체하고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다. 검이 마수의 목에 박힌다. 그 힘 그대로 몸을 갈라내고는 인간형 마수가 휘두르는 검을 밟고 뛰어올라 손을 움직인다. 투명한 와이어가 마수의 몸에 휘갈겨 도륙 낸다. 입안에 다른 해독제를 하나 더 넣어 씹어 삼키고는 마수들을 빠르게 처리해 나간다.
그 사이에 부상이 심한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회복해 다른 치명상을 입은 사람들을 데리고 위험한 공간을 빠져 나가거나 도움을 주는 식으로 전투를 이어갔다. 사람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가장 앞에 서있던 버건디가 지쳐갈 때쯤- 눈앞에서 작은 폭발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버린 버건디는 바로 제 앞에서 터진 폭탄이 자신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폭탄을 가지고 있던 것을 빠르게 처리하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간다. 이 정도의 마나를 쏟았다면 분명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
 
그때, 버건디는 후회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을 버리고 갈 것을. 눈앞에 흩날리는 회색빛의 재가 피부에 내려앉는다. 버건디를 태워야 했을 폭탄을 막은 대신, 라임의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봐왔으니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백금빛의 태양을 닮은 사람은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라임, 왜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했어. 그 말에 상대가 웃었다. 너를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버건디는 라임의 몸을 받쳐 안았다. 생각해 보면 늘 이랬어. 난 너무 약해서 너를 지키려면 늘 목숨을 바쳐야 했지. 그것이 네게 상처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어쩌면 너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는데. 그리고 내가 했던 행동은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라임,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여길 수는 있어.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행동이, 언제나... 구원이었어."
 
라임이 웃었다. 버건디도 함께 웃어 보였다.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었으니 어찌 비극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러 있지 말고 흘러가. 너는 햇살이니까. 나는 언제나 너의 자유로움을 사랑했어. 라임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 눈이 다시 뜨이는 일은 없었다. 버건디는 그가 영영 떠나버린 육신을 안아 들고 차가운 곳을 나선다.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번째 꿈.  (0) 2024.02.23
황혼의 별무리.  (0) 2024.02.19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0) 2024.02.16
잠들지 못하는 밤.  (0) 2024.02.14
환영술사의 별무리  (0) 2024.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