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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황혼의 별무리.

by @Zena__aneZ 2024. 2. 19.

헬렌의 하루는 놀라울 만큼 건조했다. 눈을 뜬다면 제 방의 천장이 보이는 것이 질렸고, 건조한 나무 옷장 안에 잘 걸려있는 옷으로 갈아입은 채로 방을 나서면 적막으로 가득한 집 안에 혼자 있었다. 나이차이가 조금 나는 형제 하나는 진작에 집을 나갔고, 이제 집에 남아있는 형제 둘과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집안이 이렇게까지 조용한 것이라면 다들 일하러 나갔거나, 공부를 하러 간 거겠구나. 헬렌은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가 낡은 책 몇 권을 챙기고 밖으로 나섰다.
헬렌은 이 세상이 단조롭고 지루했다. 서로에게 지독하리만치 무관심한 가족들도 싫었고, 일찍부터 학교에 입학해야만 편히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질렸다. 1년 전에 한 형제가 집을 나가기 전에 헬렌에게 말했다. 집이 가난해서 일찍부터 자립해야만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너는 똑똑하니 분명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을 전하고 나간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성격도, 능력도 좋은 사람이었으니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오래된 서점으로 들어가 서점 주인에게 동전 두어 개를 건넨다.
 
"아, 헬렌. 이번에는 깨끗한 책이 들어왔는데, 받으렴."
 
헬렌은 책을 읽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가장 싼 값에 공부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서점 주인도 헬렌이 그렇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깨끗한 책을 한 권 건네준다. 헬렌이 유일하게 눈이 빛나는 순간이 바로 책을 받고 펼쳐보는 순간이었다. 지독하게도 외로웠던 아이가 유일하게 빛나던 순간. 저 아이의 부모는 끝내 아이가 빛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겠지, 서점 주인은 그리 생각하곤 시선을 돌린다. 헬렌은 그런 생각도 모른 채 책을 읽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는 것은 힘이며 무지는 독이다. 하루빨리 많은 것을 배우고, 강해져서... 인정받고 싶었다.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 혼자 있기 싫었던 것이라는 사실이었지만 그런 마음까지 알아채기에는 헬렌은 너무 어렸다. 자신의 삶에 단조로움과 건조함이 외로움에서 나오는 줄도 모르고, 애정을 바라는 줄도 모른 채로 공부했다. 이렇게 하면 한 번쯤은 돌아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저편에 품은 채로.
헬렌은 천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그렇게나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가지고 있던 천재성과 스스로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이를테면 외로움과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밟히기라도 한 듯, 헬렌은 기숙학교에 홀로 들어갔다. 헬렌보다 나이가 많은 형제들은 헬렌이 있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헬렌이 천재였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혼자 남아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혼자 남겨진 건가? 노력의 결과가 겨우 이런 것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을까? 헬렌은 가만히 생각하며 차가운 건물을 바라본다. 그 안에는 헬렌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다. 남겨진, 혹은 버려진 사람들이. 곁에 있다고 생각한 가족은 신기루처럼 흩어져 떠났고, 혼자 있다는 사실만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진짜는 저 차가운 건물과 추위뿐이었다. 헬렌은 문득, 이 모든 게 환영 같다고 느꼈다. 가짜이며 진짜인 것이 뒤섞인 세상은 너무나도 잿빛이어서. 또다시 혼자 걸음을 옮겼다.
그는 단어의 뜻 그대로 천재였다. 학교 내에서 어떤 것으로도 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또한 학교 생활의 절반을 지나갔을 때에는 웬만한 어른들보다도 더 강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고, 일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이 세상은 여러 위협으로 넘쳐나는 곳이라 이른 때부터 보조역으로 많이 나갔다. 헬렌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했고, 누군가는 그를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은 헬렌을 대하기 어려워했다. 어쩌면 모두가. 헬렌은 슬픔도, 외로움도 몰랐다. 공허한 줄도 모르고 공허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어떤 햇살 좋은 날, 연락을 받았다. 몇 년 만에 가족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족의 부고소식뿐이었다. 일방적인 통보. 가족이 죽었다고. 한때나마 바라봤던 사람이. 조금은 슬플 줄 알았으나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자신에게 놀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드는 생각은, 족쇄 하나가 사라졌구나, 그 생각뿐이었다. 헬렌은 모든 흔적이 족쇄였다. 가족, 과거의 인연, 모든 말, 행동들. 슬퍼도 슬픈 줄 모르고,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망가져도 망가진 줄 모르고... 편지를 아무렇게나 구긴 채로 불태워 없앤다. 새하얀 불꽃이 편지를 흔적도 없이 녹여버린다면, 그것을 또한 가만히 내려다본다. 별빛 가득 머금은 눈이 유난하게도 쓸쓸했으나 그것을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다행이었을까? 헬렌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헬렌은 또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나가서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굳이 필요성을 못 느껴서였다. 텅 빈 채로 사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의지로 살아내는 것이 익숙했다. 학교에서 마법 연습을 하며 책을 읽다가 급한 부탁을 받고는 어느 구역의 최전선으로 걸음을 옮긴다. 마물과 사람이 한데 뒤엉켜 싸우는 것이 지옥도의 한 장면과도 같았으나 헬렌에게는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손을 뻗자 새하얀 방벽이 생겨난다. 그의 주특기인 환영술이었다. 하지만 헬렌의 환영술은 실체를 가진다. 그것은 필시 이 세상 자체를 환영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기반한 것일 테다. 마법이라는 것은 마음의 힘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니까. 눈부신 장벽이 사라지고 마물이 쉴 새 없이 갈라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이 다쳐 있었다. 헬렌은 그중 한 사람의 어깨에 제 옷을 걸쳐준다. 위험하니 물러서 있어요. 금방 처리하고, 보금자리를 돌려드릴게요. 언젠가 책에서 봤던 다정했던 사람의 말을 흉내 낸다. 완벽하게 배운 다정함이 퍽이나 쓸모 있었다. 정작 헬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했지만. 헬렌이 마물의 처리를 끝내고 뒤돌아보니 헬렌이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밝게 웃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헬렌이 걸쳐줬던 옷을 곱게 개어 손에 들려주며 덕분에 살았다는 말을 전하고 고개를 숙여 보인다.
 
헬렌은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감사 인사를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온 사람도 처음이었으니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린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큰 도움은 아니라고 말을 잇는다. 누구나 다 도와줬을 거라면서. 아니에요, 마법사님. 모든 사람이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주진 않아요. 감사해요, 겨우 그 말 한마디가 마음 깊은 곳을 들춰낸다. 모든 사람이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모두가 그런 약자의 손을 잡아주지도 않는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은 시간이 아팠던 걸까? 알아주기만을 기다리며, 오래도록 아팠을까? 헬렌은 복잡한 생각을 미뤄두고는 그 사람에게 도로 제 겉옷을 걸쳐준다. 날이 추우니 입고 계세요,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헬렌은 그린 듯한 웃음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지었던 것 같은 평범한 미소를 지었다. 도움을 받은 사람과 가볍게 몇 마디 정도를 더 주고받고는 학교로 다시 돌아간다. 천천히 걸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많은 정리도 했고. 사람을 직접 구하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지 못했던 어린아이는 많이 외로웠다. 외로워도 외로운 줄 모르고, 아픈줄도 모른 채로 많이 아팠구나.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별무리를 꼭 닮은 눈이 올려다본 하늘은 온통 황혼빛이었다. 한낮의 태양만큼이나 눈부신 하얀 머리칼을 바람이 흩트려놓는다. 헬렌은 어느새 길게 자란 머리칼을 넘긴다. 짙게 자리 잡힌 공허에서 이제 막 한 발자국 내디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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