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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별빛 머금은 왈츠

by @Zena__aneZ 2024. 2. 26.

밤하늘에 별이 금방이라도 땅에 떨어질 듯 일렁거린다. 푸름 가득 머금은 청량한 바람은 한껏 불어와 길게 물결치는 새하얀 머리칼을 잔뜩 흐트러트린다. 유성우보다 빛나는 황금색 눈이 높은 하늘만을 가득 담아낸다. 헬렌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표정에 가까웠던 포근하고도 부드러운 표정은 이내 화사함 가득 머금은 고운 웃음이 되었다. 아직 연회는 한참 진행 중인 것이 아니었나요? 헬렌의 물음에 한은 잠시 할 말을 고르다가 금세 포기하곤 헬렌의 옆에 섰다. 내가 그런 걸 즐기는 타입이 아닌 걸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돌아온 대답에 짐짓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리던 헬렌은 시선을 하늘로 향한다. 한은 그런 헬렌을 눈에 담고 있다가 제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준다.

 

"여름이 오고 있다고 해도 밤은 쌀쌀해."

 

"고마워요, 마침 조금 서늘한 기분이었는데."

 

헬렌은 제 머리칼을 잘 넘기곤 옷을 받아 걸친다. 길게 늘어진 연푸른 드레스는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얇았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따뜻하게 입는 게 좋겠다는 말에 긍정한다.

 

"그나저나, 어떻게 빠져나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엄청 찾았을 텐데."

 

"... 그냥, 무시하고."

 

"연회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둘이 밖에서 이러고 있다니, 조금 웃긴 것 같기도 하네요."

 

둘 다 화려한 연회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초대를 받았으니 당연히 응해야 했고, 이런 기회를 틈타 다가오는 사람들을 여간 귀찮아하던 것이 아니었던지라 결국 둘은 바깥으로 몰래 빠져나오는 일이 잦았다. 둘은 전투에 능하고 능력이 좋았을 뿐, 높은 분들과 같이 있던 것은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투를 하는 것으로 축하를 받는 것이 영 꺼름직하기도 했고. 찬 바람이 또다시 한껏 불어온다. 흐트러지는 하얀 별빛의 머리칼이 뺨을 간지럽히고, 한은 손을 뻗어 머리칼을 넘겨준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손길에 헬렌은 또 웃어버리고, 제 머리칼을 정리해 주느라 신경 쓰지 않는 한의 흑단 같은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준다.

 

"피곤하진 않아? 당신, 어제 늦게까지 산책했잖아."

 

"전혀요. 그러는 한, 당신은요? 한도 나와 같이 산책했잖아요."

 

나도 마찬가지로, 그리 피곤하진 않아. 그럼 다행이네요. 그런 대화를 나누고는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카만 밤하늘에 수놓인 하얀 별이 아름다웠다. 어느덧 연회가 한창인 건물 안에서는 악기가 연주하는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린다. 이제 무도회가 시작되려나 봐요. 들어가기 싫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한 헬렌의 표정을 보던 한은 헬렌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지곤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기 싫다면 여기서 몰래 추고 갈까? 그 말에 큰 눈을 깜빡이던 헬렌은 싫은 기색은 말끔히 지워내고 그의 큰 손 위에 제 하얀 손을 겹친다.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바람에 실려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했지만 아스라지는 별빛과 황금빛과 푸른빛이 같이 섞여 들어 흐릿한 음악의 공백을 가득 채운다.

 

"춤 연습은 따로 했어요?"

 

"당신에게 민폐가 될 정도로 못 추면 안 되니까."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추며 춤을 이어간다. 연푸른빛 긴 치맛자락이 부드럽게 휘날린다. 꽃이 만개한 고요한 정원 한가운데서의 왈츠가 깊은 시간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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