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은 늘 꿈을 꾸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꿈에서는 다정한 사람이 나온다. 류연은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지만 그를 그리워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를 그리워한다니... 류연은 늘 정원과도 같은 공간 속에 홀로 서있다가 중얼거린다. 가지 마, 가지 마세요. 누군가에게 전하는지도 모를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깊고 깊은 꿈 속에서 달그림자 같은 얼굴을 한 번 비추고 사라지는 사람을 왜 그렇게 붙잡고 싶어 하는가. 류연은 그런 생각과 함께 잠에서 깼다.
찝찝한 꿈이다. 하지만 분명 행복하기도 한 꿈이다. 악몽을 꾸면 분명 기분이 나빠지지만 그 꿈을 꿀 때만큼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그럼에도 찝찝한 이유는 늘 어딘가 둔해지기 때문이다. 어린 날부터 이어온 꿈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 쭉 이어져오고 있다. 오늘은 일 나가는 것을 하지 말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어떻게든 움직여 끈적하게 달라붙는 미묘한 기분을 떨쳐내고 싶었기에 평소처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이 더 거대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죄책감인지, 슬픔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었다. 구분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류연은 그저 좋은 사람이기에 무언가를 베어 없애는 것이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류연은 북부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들을 베어 없애는 것에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바닥에 흩뿌려진 선명한 피를 어떻게 외면하는 거지?
류연은 푸르게 빛나는 창에서 힘을 거두었다. 창은 그저 평범한 대의 형태로 돌아온다. 여기서 일을 더 이어가다가는 잡념에 잡아먹혀 큰 부상을 당할 것이 당연했으니까.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마수의 파편을 집어 들고 걸음을 돌렸다. 의뢰를 완료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가야만 했다.
류연은 북부 용병단 소속이지만 용병단에 갈 때는 의뢰를 받기 위해서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북부의 용병단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것은 그가 좋아하지 않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비를 누가 좋아하겠냐만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 다른 길로 들어선 순간, 뒤편에서 누군가가 따라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류연은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신경 쓰기에는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팔을 잡아챈다. 잡히자마자 반사적으로 뿌리쳤지만 상대는 끈질겼다.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달그림자가 말을 걸어온다. 좋은 꿈 꿔. 하필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 류연의 몸이 굳은 것을 상대가 알아챘는지 그에게 짧은 단검을 들고 찌르려 했다.
왜 나를 찌르려 할까? 그 생각만이 들었다. 이유 없는 악의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렴풋한 행복 속에만 존재하는 달그림자를 닮은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지독한 현실감이 물밀듯이 쓸려온다. 아, 정말... 지독하게도. 류연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무기를 꺼내 상대를 다치게 할 수도 있었고 죽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당방위에 가까웠으니.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바닥에 흩뿌려지는 피가 무섭다. 살육이 두렵다. 점차 사람이 아닌 것이 되어가는 감각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다칠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아픔이라곤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류연은 조심히 눈을 뜨고 고개를 슬 들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의 사람이, 그에게 해코지하려던 이의 손목을 부러질 기세로 잡고 있었다.
"아저씨...?"
류연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린다. 방금까지 이어진 생각들이 어지럽게 흩트려놓는다. 디안은 미치광이의 손목을 더러운 것 버리듯 놓아버리곤 류연을 돌아본다. 미치광이가 도망치는 것을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디안은 괜찮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런 질문마저 알 수 없는 감정에 물든 것처럼 떨렸다. 류연은 그 불안감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어디 다치진 않았고?"
"네, 네... 괜찮아요. 멀쩡해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널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야. 디안이 조심스럽게 류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주듯이. 빠른 심장 소리가 들린다. 아, 누군가가 걱정하고 있어... 류연은 조심히 눈을 감았다 뜨곤 옷자락만 살짝 잡는다.
디안은 불안했다. 그의 불안감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존재했다. 누군가를 잃은 것이 평생의 상처로 남았고, 그것은 어떻게 해도 절대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불안감을 끌어안은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잃은 것에 슬퍼하여 평생을 아파하는 어리석은 것. 그럼에도 또다시 타인을 사랑하고 아끼게 되는 것이 그의 본질이라.
불타 죽은 가족들, 직접 거둬들인 아이들, 그런 아이들과 같은 아이. 디안은 류연에게서 슬픔을 엿보곤 했다. 그것은 디안의 불안감과 궤를 같이 하는 감정인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아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제 아이들과 같은 나이의 아이가 슬픔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안타까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시선이 조금 더 머물렀다. 어린아이가 견디기만 하는 것을 보는 게 영 버거웠다. 그래서 손을 뻗었고, 아이를 지켰다.
"괜찮니?"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바로 손을 뻗어 미치광이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불온한 고양감이 디안을 과거의 한때로 밀어 넣었다. 불타는 집과, 바닥에 차게 흩뿌려진 피와, 그 사이에 늘어진 손길과 같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목소리가 볼품없게 떨린다. 하지만 제 목소리보다 아이의 목소리가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작은 아이였는데. 그래서 감싸 안았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아이의 떨림에 다 묻혀 사라지길 바랐다. 디안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이의 떨림이 서서히 멎어간다. 한 차례 가다듬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온다. 저 괜찮아요, 아저씨가 지켜 주셨잖아요. 아, 그래. 이번에는 지켰구나. 이번만큼은... 늦지 않았구나. 그 사실이 서서히 떨림을 멈추게 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강한 부분이 있고, 어쩔 수 없이 나약한 부분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은 달그림자를 닮았다. 그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다만 달그림자에 몸을 뉘이고 있던 이들은 그러한 아픔을 잘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도닥여주기도 하고, 함께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강인함이었으리라.
안녕하세요, 글쓴이입니다.
글에 이렇게 본격적으로 코멘트를 다는 것은 처음이네요. 하지만 글을 읽는 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그마한 글을 남겨보려 합니다. 사실 글을 쓸 때에는 개인의 해석에 따라 말을 얹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글만큼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그림자가 갖는 의미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의미들 중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이 없는 이유는, 그림자는 눈에 정확히 보이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찔할 정도로 빛나는 태양 아래에는 그림자가 있으나 어느 누구도 그림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어 마땅하나 그것을 외면합니다. 저는 그것이 사람들의 생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사람은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요.
그렇다면 달그림자란 어떤 것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달의 그림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달의 그림자는 개인의 상처일 수도 있고, 지나가버린 과거일 수도 있으며, 미련이나 후회, 혹은 지난 영광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다른 이유가 더 존재할 수도 있죠. 이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의 수만큼 다양한 뜻 가지고 있을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다채로운 대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그림자이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은 절대 상대의 그림자를 완벽하게 바라보지 못합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을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에 어떻게 완벽한 이해를 건넬 수 있을까요?
그림자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나라면 너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 얼마나 치기어리고 오만한 말인지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림자를 보아도 그저 모른 체합니다. 어중간한 위로는 더욱 큰 상처로 남는다는 것을,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말을 삼킨 채로 옆에 있습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마 평생토록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에도 곁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사랑에는 이해가 따르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각자의 달그림자 속에 누워 보이지 않는 자세로 잠을 청하겠지만, 누군가는 그런 그림자를 하염없이 쓰다듬어줄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어. 하면서요.
달그림자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달그림자를 알아봅니다. 그것이 궤를 같이 하는 그리움이나 슬픔이 아니더라도요. 그것에 온전한 침묵과 온기를 건넵니다.
이 글에 나온 류연과 디안이라는 두 인물도 같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온전히 알 수 없지만 침묵과 함께 온기를 건넵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각자 다른 슬픔을 품고, 각자 다른 이유를 품고...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잘 맞물려 돌아갑니다. 어쩔 수 없이 강인한 사람들이니까요.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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